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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안자체’ ‘추유을체’ ‘이종희체’ ‘김영분체’ ‘이원순체’. 할머니들의 이름이 붙은 글씨체가 있다. 다섯명이 경북 칠곡에 살고 있어서 ‘칠곡할매서체’다. 칠곡군의 한글교실을 다녔던 다섯 할머니의 글씨체는 지난 5월 소프트웨어 업체인 한글과컴퓨터가 한컴오피스에 정식으로 탑재한다고 발표했다.

‘칠곡할매서체’의 원작자 할머니들 | 칠곡군청 제공

‘칠곡할매서체’의 원작자 할머니들 | 칠곡군청 제공

칠곡할매서체 원작자 중 한명인 권안자 할머니. | 칠곡군청 ‘칠곡할매서체 이야기’ 영상 캡쳐 화면

칠곡할매서체 원작자 중 한명인 권안자 할머니. | 칠곡군청 ‘칠곡할매서체 이야기’ 영상 캡쳐 화면

한글교실 할머니들의 손글씨를 폰트로 바꾼 이들은 칠곡군 성인문해교실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군청 평생교육담당 한선혁 계장과 이정홍 주무관이다.

“코로나19가 확산하던 작년 초에 문해교실에 다니는 이학연 할머니가 ‘다함께 코로나19를 극복하자’는 편지글을 쓰셨어요. 그 편지가 언론에 공개가 됐는데 내용도 너무 좋았지만, 저희가 보니까 글씨를 너무 이쁘게 쓰신 거예요. (한글을 몰라) 평생 못쓰시다가 이제야 읽기도 하고 쓰기도 하시는데, 글씨에 그간 살아오신 인생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추사 김정희가 글씨를 남겼듯이 할머니들의 글씨도 남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이정홍 주무관)

‘칠곡할매’ 이학연 할머니가 편지를 쓰고 있다. 이학연 할머니 글씨는  “너무 잘 쓴다”는 이유로 오히려 칠곡할매서체로 선정되지 못했다.  | 강윤중 기자

‘칠곡할매’ 이학연 할머니가 편지를 쓰고 있다. 이학연 할머니 글씨는 “너무 잘 쓴다”는 이유로 오히려 칠곡할매서체로 선정되지 못했다. | 강윤중 기자

이정홍 주무관은 “문해교실 할머니들 글씨 400개를 나란히 놓고 골랐다. 고르는 일이 너무 힘들었는데 독특한 글씨들로 다양하게 5종을 선정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작 이학연 할머니 글씨는 선정되지 않았다. “사실 이학연 할머니 글씨체는 너무 잘 쓰시는 바람에 최종 서체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이학연 할머니 이야기 ‘한글학교 개학 손꼽아 기다리는 칠곡 할매들’ 링크 https://news.khan.kr/SvaF

칠곡군청이 문해교실 할머니들의 글씨체로 ‘칠곡할매서체’를 만든 뒤 표구해 액자로 걸어놓았다. | 칠곡군청 제공

칠곡군청이 문해교실 할머니들의 글씨체로 ‘칠곡할매서체’를 만든 뒤 표구해 액자로 걸어놓았다. | 칠곡군청 제공

독특한 글씨체를 가진 5명의 할머니들은 4개월 동안 각자의 폰트를 완성해 갔다. 서체 개발을 위해 한 명당 2000장의 종이가 사용됐다.

“한번 할 때마다 열장쓱 했다. 두 시간씩 걸렸지. 한글은 적겠는데 영어는 잘 몬하겠더라. 이거 적는다고 한글 안이자뿌고 지냈다”(권안자)

“글씨를 더 예쁘게 써야 안되나 했는데 아닌가 봐. 그냥 쓴 게 더 좋다대. 아직도 이해는 안돼. 내 글씨가 뭐 이쁜고”(추유을)

“글자를 썼다가 지웠다 하도 하이끼네 볼펜 3개 이거는 금방이라. 다 쓰고 세할려보니까 7개 썼드라. 뭐가 뭔지는 몰라도 아들딸한테 도움 되겠지하면서 했지. 배우는 거는 재밌으니까”(이종희)

“한석봉이처럼 내가 글자 잘 써서 쓴다카는데 내가 뭣이기 잘 쓰노. 폰트 나오면 자식들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지”(김영분)

“폰트가 뭐꼬? 똑같이 잘 쓰고 싶은데 손도 떨리고 왜 이래 잘 안되노. 영어는 왜 이래 꼬불랑 거리고 손이 내 맘대로 안된다카이. 아들도 옆에서 보고 잘한다카이 더 잘해야겠다 싶었어”(이원순)

칠곡할매서체 원작자 중 한명인 이원순 할머니. | 칠곡군청 ‘칠곡할매서체 이야기’ 영상 캡쳐 화면

칠곡할매서체 원작자 중 한명인 이원순 할머니. | 칠곡군청 ‘칠곡할매서체 이야기’ 영상 캡쳐 화면

칠곡군청에서는 현수막이나, 팜플렛을 제작할 때 ‘칠곡할매체’를 활용한다. 이 주무관은 “글씨마다 특색이 있어서 골고루 사용한다”고 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권안자체를 특히 많이 쓰는 편이에요. 글씨를 반듯반듯하게 쓰셔서 눈에 잘 들어오거든요. 이미지가 각인이 잘 돼요.”

칠곡할매체는 칠곡과 경북 지역 이곳저곳에서 사용된다. 백선기 칠곡군수는 칠곡할매서체 5종을 이용해 5가지 종류의 명함을 만들어 사용한다. 동네 분식집과 치킨집은 칠곡할매체를 이용해 배달 음식을 시킨 손님들에게 편지를 썼고, 해병대에서는 서체를 이용해 ‘신병 환영’ 현수막을 제작했다. 경북 경주 공업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응원하는 현수막을 제작하면서 서체를 활용했다. 이 주무관은 “며칠 전에는 제주도의 한 학교에서 칠곡할매서체를 사용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칠곡할매서체가 사용된 학교 현수막 | 칠곡군청 제공

칠곡할매서체가 사용된 학교 현수막 | 칠곡군청 제공

칠곡할매서체가 사용된 분식집 안내문 | 칠곡군청 제공

칠곡할매서체가 사용된 분식집 안내문 | 칠곡군청 제공

사람들은 왜 ‘할매들’의 서체를 선택하는 것일까. 이 주무관은 “할머니들의 손글씨체에 따뜻한 감성이 담겨서 그런 것 같다”며 “글씨를 보면 엄마 글씨 같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한글과컴퓨터가 한컴오피스에 칠곡할매서체를 정식등록하자, 글씨체 원작자 중 한 사람인 추유을 할머니는 토마토와 가지, 오이 등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상자에 담아 한글과컴퓨터 측에 전해달라며 칠곡군청을 찾기도 했다. 추 할머니는 “너무 감사한 마음에 농산물을 준비했다”면서 “내가 죽더라도 글꼴을 통해 나를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칠곡할매서체’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칠곡군청 홈페이지 링크 https://www.chilgok.go.kr/portal/contents.do?mId=0404070100

칠곡할매서체는 공공저작물로 누구나 다운로드받아서 사용할 수 있다. 칠곡군청에서 칠곡할매서체를 다운로드 받아 설치하면 컴퓨터에 설치된 대부분의 워드프로세서 등에서 서체를 사용할 수 있다. 인쇄물이나 출판용 서책, 웹사이트 등에서 사용할 때는 ‘칠곡할매서체를 사용하여 디자인 됐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출처만 명시하면 된다.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도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로컬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하거나, 가게를 내거나, 농사를 짓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티컬 채널 ‘밭’(facebook.com/baht.local)은 로컬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서울 말고 로컬’ 연재로 나만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acebook.com/baht.lo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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