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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라이프

서울 말고 로컬⑤

충북 옥천 지역의 이야기를 담은 잡지 ‘월간 옥이네’의 박누리 편집장(오른쪽)과 정서영 기자가 지난 22일 사무실 앞 금거북이길을 걷고 있다.

충북 옥천 지역의 이야기를 담은 잡지 ‘월간 옥이네’의 박누리 편집장(오른쪽)과 정서영 기자가 지난 22일 사무실 앞 금거북이길을 걷고 있다.

“제 애인은 착하고 저와도 잘 맞아서 결혼하려고 합니다. 근데 저희 부모님은 그 친구의 직업이 변변찮고 벌이도 좋지 않다며, 가진 것 많고 직업도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라고 합니다. 지금의 애인과 결혼하면 부모님 말씀처럼 후회하게 될까요?” 충북 옥천의 잡지 ‘월간 옥이네’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OK 라디오’에 사연이 소개됐다. 청년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이들은 옥천 안남면의 할머니들이다. 박옥분 할머니(88)가 “마음 잘 맞는 사람 만나면 재산이 좀 없어도 사는 거지, 마음 맞고 알뜰하게 살면 돈은 모여”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이순하 할머니(90)도 “돈 같은 것도 있어야 하지만 첫째로 마음이 같이 잘 맞아야 사는 거야”라고 맞장구를 쳤다. 진행자 이상윤 PD(33)가 ‘할머니들은 어떤 고민이 있냐’고 묻자 순간 만담이 펼쳐졌다. “나는 어디에다 말 못할 고민이 하나 있어.”(이순하) “그게 뭔데요?”(이상윤) “말 못햐.”(이순하) “그런 건 말해서 확 풀어야지. 고민을 마음속에 넣고 있으면 병들어.”(박옥분)

‘월간 옥이네’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OK 라디오’에 출연한 옥천 안남면의 송영금(왼쪽), 오점순 할머니. | 고래실 제공

‘월간 옥이네’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OK 라디오’에 출연한 옥천 안남면의 송영금(왼쪽), 오점순 할머니. | 고래실 제공

■시시콜콜 시골잡지

안남면 할머니들의 고민 상담은 ‘옥이네’에 연재됐다. 할머니들은 “첫 자녀는 어떻게 키워야 하나요”라는 예비 아빠의 질문에 “우리 애는 아버지랑 친구처럼 지냈어. 그래서 크게 혼낼 일도 없었어”(송영금 할머니)라고 말해주고, “할머니 생신 선물로 옷을 사려는데 어떤 색이 좋을까요?”라는 질문엔 “노인들은 시커먼 걸 입으면 어째 얼굴이 더 검어 보여. 곱게 입는 게 낫지. 옷도 좋지만 현금이 더 좋긴 해”(유봉순 할머니)라고 말한다. ‘시시콜콜 시골잡지’를 표방하는 ‘옥이네’는 옥천의 사회적기업 ‘주식회사 고래실’이 발행하는 매체다. 고래실은 대전에서 지역잡지를 만들던 이범석 대표(49)가 2017년 옥천으로 이주해 설립했는데, 이 대표를 제외한 임직원 13명 모두 20~30대 청년들이다. 이 대표는 “‘옥이네’는 옥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소한 이야기들을 기록한다. 옥천의 일상이 켜켜이 쌓이면 그게 바로 옥천의 역사가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회적 기업 ‘고래실’이 발행하는 ‘월간 옥이네’

사회적 기업 ‘고래실’이 발행하는 ‘월간 옥이네’

팟캐스트도 안남면 할머니들의 일생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어르신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안남어머니학교’가 지난해 고래실에 할머니들의 자서전 제작을 제안했고, 기자들이 할머니 24명을 취재해 책으로 엮었다. 지난해 ‘옥이네’ 12월호 특집기사는 어머니학교 할머니들에 대해 다뤘다. 이상윤 PD도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음성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그는 “취향과 개성이 뚜렷한 할머니들을 그냥 ‘어르신들’로 묶고 싶지 않았다. 이순하, 박옥분, 송영금, 유봉순 등 다른 삶을 살았고, 다른 개성을 가진 할머니들이 젊은이들의 고민을 어떻게 보실지, 어떤 말씀을 해주실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팟캐스트 ‘OK 라디오’를 진행하는 이상윤 PD.

팟캐스트 ‘OK 라디오’를 진행하는 이상윤 PD.

지난 22일 고래실이 있는 옥천읍 금구리 금거북이길을 찾았다. KT 옥천지사 뒤편에 있는 300m 길이의 골목인데, 옥천의 지역신문인 ‘옥천신문’과, 공동체 라디오를 준비 중인 ‘청암송건호기념사업회’, 무가 생활정보지를 발행하는 편집디자인 업체 ‘우리동네’ 등 옥천의 지역언론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 고래실은 막창집으로 쓰였던 2층 건물에 입주했는데, 1층은 카페 ‘둠벙’, 2층은 사무실로 운영한다. ‘둠벙’ 한쪽 벽면 책장엔 만화책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음료 한잔 시키면, 문 닫을 때까지 만화책을 볼 수 있다. 금거북이길의 기자들이 점심 식사 후 커피를 마시러 모이는 평일 낮 시간대를 빼면 둠벙은 거의 청소년들의 공간이다. 고래실은 토요일 정오부터 오후 6시까지 둠벙을 ‘청소년 자립카페’로 운영한다. 청소년들이 음료와 디저트 메뉴를 직접 만들어 스스로 정한 가격에 파는데 토요일 하루 10만~15만원 정도 나오는 매출도 청소년들이 가져간다. 바리스타 교육을 받은 청소년에게는 카페 운영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카페 ‘둠벙’.

카페 ‘둠벙’.

카페 ‘둠벙’ 벽에 ‘둠벙 청소년 자립카페’ 참가자 모집 포스터가 붙어있다.

카페 ‘둠벙’ 벽에 ‘둠벙 청소년 자립카페’ 참가자 모집 포스터가 붙어있다.

지역의 10대들이 직접 요리를 하는 ‘청소년 골목식당’ 프로그램과 청소년들이 스스로 코스와 일정, 경비를 정해 여행을 떠나는 ‘청소년이 디자인하는 여행’ 등도 활발히 진행된다. 이 같은 프로그램에서 성인들은 ‘길잡이 교사’가 돼 안전사고 등에 대비한다. 초대 ‘옥이네’ 편집장이었던 장재원 기획협력국장(39)은 “청소년들이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결정하는 법을 경험해야 세상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의 삶을 결정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일을 결정하는 ‘자치’에 대해 배우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초대 ‘옥이네’ 편집장인 장재원 기획협력국장.

초대 ‘옥이네’ 편집장인 장재원 기획협력국장.

■‘선수’로 뛰는 기자들

“32년 전 옥천신문이 창간했을 때 1면 기사 제목이 ‘옥천 청소년, 갈 곳 없다’였어요. 청소년들 갈 곳이 없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거든요. 기사를 써도 옥천에는 변화를 실현시킬 조직이 없는 거예요. 나가서 ‘선수’로 뛰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2019년 옥천신문 10년차 기자였던 박누리 ‘옥이네’ 편집장(36)은 신문사를 퇴사하고 ‘옥이네’에 입사했다. 박 편집장은 지역 청년들과 함께 ‘청소년 기본소득’을 실험했다. “서울에서 무대 미술 일을 하다가 안내면에서 카페를 하는 청년이 있어요. 그분이 ‘내가 어렸을 때 물감 살 돈이 있었으면 더 빨리 꿈을 이뤘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기억에 많이 남았어요. 옥천에는 그런 청소년들이 되게 많거든요.” 이들은 지난해 9월부터 6주 동안 안내면의 안내중학교 전교생 18명에게 20만원어치의 지역화폐를 지급했다. “지역 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하면 소속감이나 지역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기회도 적어지고 결국 지역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을까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기본소득’ 실험이 지역 공동체를 경험하는 큰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월간 옥이네’ 박누리 편집장.

‘월간 옥이네’ 박누리 편집장.

이들의 기본소득 실험은 ‘옥이네’에도 실렸다. “동네 친구들과 동생들, 가족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수 있었다. 너무 뿌듯해서 내가 더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기본소득을 받은 학생들의 후기다. 고래실과 옥천 청년들은 토론회를 열고 ‘만 13~19세 청소년 2800여명에게 매월 5만원씩 지급하자’고 지역사회에 제안했다. 박 편집장은 “예산이 17억원 정도 소요되는데 옥천군 전체 예산에 비하면 큰돈은 아니다. 연간 예산 중 다 쓰지 못하고 남기는 순세계잉여금만도 500억원대에 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군의원들을 찾아가 청소년 기본소득 조례 제정 설득 작업도 벌였다. 옥천군은 지난달 만 13~15세 청소년에게 연 7만원, 만 16~18세 청소년에게 연 10만원의 ‘바우처’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옥천 청소년들이 2020년 12월 20일 카페 둠벙에서 온라인으로 ‘금거북이 골목 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 고래실 제공

옥천 청소년들이 2020년 12월 20일 카페 둠벙에서 온라인으로 ‘금거북이 골목 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 고래실 제공

지난해 ‘옥이네’는 옥천의 길고양이 문제를 특집으로 다뤘다. 옥천군이 길고양이가 쓰레기봉투를 물어뜯는 것을 막겠다며 “쓰레기봉투에 모기약을 뿌려달라”고 안내문을 붙인 일이 계기가 됐다. 박 편집장은 옥천 길고양이들의 동선을 따라나갔다가 ‘캣맘’ ‘캣대디’들을 만났고, 그들을 인터뷰했다. “어떤 이웃들이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지 서로 궁금해했어요. 각자 ‘점’처럼 활동하니까요. 모든 분들은 제가 만나봤으니 서로 연결하기 위해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옥천마을고양이보호협회’가 만들어졌다. 동물권을 주제로 강사를 초청해 강연도 열었다. ‘둠벙’을 찾은 날도 길고양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포스터와 작은 책자가 한편에 전시돼 있었다. 군의원에게 길고양이 보호 조례안도 제안했지만 반영되지는 않았다.

월간 ‘옥이네’ 정서영 기자.

월간 ‘옥이네’ 정서영 기자.

■배추 농사 짓는 청년들

지난해 11월 고래실에 입사한 정서영 기자(25)는 옥천신문의 ‘기자 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했다가 고래실에 입사지원서를 냈다. 경남 김해 출신인 그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 정 기자는 “지역에 필요한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운영해보고 싶어 문을 두드렸다”고 했다. 최근 발행된 ‘옥이네’ 7월호에는 ‘우리밀’ 특집이 실렸는데 정 기자와 박 편집장이 쓴 기사다. 둘은 밀 수확철을 맞아 옥천에서 밀 농사를 짓는 농민 16명, 밀을 사용하는 빵집 3곳, 옥천 군북면에서 지난해까지 우리밀로 칼국수집을 했던 부부, 시민단체 관계자 등 총 24명을 인터뷰했다. 이렇게 연을 맺은 옥천의 농민과도 여러 행사를 기획한다. 최근에는 옥천 로컬푸드에 대한 이야기를 소책자로 만들어 농산물 꾸러미와 함께 배송하는 ‘딜리셔스 레터’를 두 차례 발행하기도 했다. 8월에는 군북면 밭을 빌려 직접 배추와 무도 키울 계획이다. 옥천군과 인근 지역 주민, 서울에 사는 이들까지 총 10팀이 모였다. “‘옥이네’에 소농과 농업의 가치를 말하는 기사들이 자주 실리거든요. 이번에는 저희가 직접 농사를 짓는 활동을 해보기로 했어요. 취재하면서 만난 군북면 농민들에게 연락을 드렸죠. ‘그 마을에 텃밭을 구했는데 훈수 좀 놔달라’고요. 흔쾌히 ‘그럼 내가 가서 한번 도와줄게요’ 하시더라고요.”(박누리 편집장)

고래실이 있는 옥천읍 금구리 금거북이길. KT 옥천지사 뒤편에 있는 300m 길이의 골목인데, 옥천의 지역신문인 ‘옥천신문’과, 공동체 라디오를 준비 중인 ‘청암송건호기념사업회’, 무가 생활정보지를 발행하는 편집디자인 업체 ‘우리동네’ 등 옥천의 지역언론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

고래실이 있는 옥천읍 금구리 금거북이길. KT 옥천지사 뒤편에 있는 300m 길이의 골목인데, 옥천의 지역신문인 ‘옥천신문’과, 공동체 라디오를 준비 중인 ‘청암송건호기념사업회’, 무가 생활정보지를 발행하는 편집디자인 업체 ‘우리동네’ 등 옥천의 지역언론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

도시에서 온 기자들이 많다 보니 농사 용어와 충북 사투리를 잘 몰라 애를 먹는 경우도 있다. 정 기자는 “인터뷰를 하는데 ‘비닐 멀칭’(밭에 검은 비닐을 덮는 작업), ‘로터리를 쳤다’(밭을 경운기로 가는 작업) 이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멀칭? 로터리? 로터리클럽(국제봉사단체)을 말하는 것도 아닐 테고…”라고 했다. 박 편집장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했다. “옥천에서는 ‘날망’이라는 단어를 써요. 산마루 같은 어떤 꼭대기를 얘기하는 건데 저는 동네 지명인 줄 알았어요. 선배들에게 ‘날망이 어느 지역이냐’고 물었는데 다들 깔깔 웃더라고요.” 몇 년 전 옥천신문 수습기자 시험에는 ‘옥천군의 AI 상황에 대해 취재하라’는 문제가 나오기도 했다. AI는 도시에서는 ‘인공지능’으로 쓰이지만, 농촌에서는 ‘조류독감’으로 통하는 말이다. 도시에서 온 수험생들이 옥천군의 인공지능을 취재하려 했다는 얘기는 금거북이길에서 유명한 일화다.

카페 둠벙 전경. 2층에는 고래실 사무실이 있다.

카페 둠벙 전경. 2층에는 고래실 사무실이 있다.

이범석 고래실 대표.

이범석 고래실 대표.

올해 네살이 된 ‘옥이네’와 고래실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 박 편집장은 “옥천의 문제는 옥천만의 문제가 아니라 옥천하고 비슷한 농촌 지역들이 겪는 문제들”이라며 “농촌의 문제를 같이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이야기들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범석 고래실 대표는 “금거북이길의 다른 언론사들과 함께 지역언론에 대해 고민하는 ‘미디어 스쿨’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옥천에는 미디어라는 무기를 가진 젊은 기업이 많아요. 이들과 미디어 스쿨을 만들어 청년 언론인들을 키워가고 싶어요. 청년들이 ‘옥이네’ 등 옥천의 매체들이 지역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 지역언론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배우고, 곳곳에 가서 퍼뜨려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글 이재덕 기자 · 사진 채용민 피디 duk@kyunghyang.com


도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로컬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하거나, 가게를 내거나, 농사를 짓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티컬 채널 ‘밭’(facebook.com/baht.local)은 로컬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서울 말고 로컬’ 연재로 나만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acebook.com/baht.lo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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