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불광문고, 내달 5일 폐업 예고

나는 ‘좋은 서점’이었지만…살아남진 못할 것 같습니다

2021.08.29 21:07 입력 2021.08.29 21:13 수정 글·사진 허남설 기자

서울 은평구 불광동 불광문고(위 사진) 입구에 폐업 소식을 전하는 펼침막과 직원들의 편지가 걸려 있다.

동네에 도서관도 없던 시절
지역 주민 위해 사회적 공헌

불완전 도서정가제에 위기
책 배달 등 자구책에도 한계
건물주 지원 없으면 문 닫아

불광문고는 1996년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서 문을 연 서점이다. 문제집과 참고서를 파는 학교 앞 서점이 전부였던 지역에서 처음으로 단행본을 대거 취급했다. 은평구에서 나고 자란 장수련씨(45)는 그때 “이제 책을 사러 종로까지 나가지 않아도 된다”며 기뻐했었다. 장씨는 지금 불광문고 점장이다. 그는 1999년 불광문고 옆 돈까스·우동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서점 사장 눈에 들어 직원이 됐다. 지난 28일 만난 장씨는 그해 불광문고 풍경을 “동네 꼬마손님들이 발에 차이도록 많았다. 옛날 명절을 앞둔 목욕탕처럼 바글바글했다”고 기억했다.

22년이 흘렀다. 장씨는 이제 자신의 손으로 불광문고 문을 닫을 준비를 한다. 마지막 영업일은 9월5일이다. ‘22년’은 대형서점이 우세종으로 자리 잡고, 판매를 넘어 유통도 넘보는 변이를 거친 시간이었다. 정순구 역사비평사 대표는 지난 14일 소셜미디어에 쓴 ‘불광문고의 소멸을 애도하며’란 글에서 “고독사”라고 했다. 여느 지역서점처럼 불광문고도 열악한 환경 속에 도태되는 운명을 맞았다는 뜻이다. 정가의 10% 할인을 용인하는 ‘불완전’ 도서정가제, 대형서점보다 10~15% 더 높은 공급가격…. 지역서점이 이 문제를 성토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다만, 불광문고의 마지막이 고독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불광문고보다 어릴 법한 예전의 ‘동네 꼬마손님’ 때문이다. 이들은 소셜미디어에서 부모 손을 잡고 서점에 처음 발을 내디뎠거나, 하교 후 친구와 시간을 때우던 순간들을 추억하기 시작했다. 지난 19일 은평구엔 “불광문고 폐업을 막을 방안을 고민해 달라”는 청원이 제출됐고, 29일 현재 1500명이 넘는다.

불광문고도 지역의 인문환경에서 남다른 의미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자연히 대형서점과는 다른 운영 방식이 자리 잡았다. 불광문고가 책을 진열하는 원칙에서 잘 드러난다. 어린이책은 잘 팔리는 만화보다는 창작동화와 그림책 위주로 전시했다. 이곳에서 상상력을 키우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키다리아저씨> 같은 어린이용 명작 중 편역(원문 그대로 옮기지 않고 편집한 번역) 도서는 내용 자체가 온전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아예 배제했다.

숱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불광문고의 걸음은 여기까지다. 어쨌든 책을 파는 공간인데, 책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이후 ‘집콕’ 문화가 확산돼 도서판매량이 늘었다는 건 온라인서점의 이야기다. 불광문고는 지난 17일 폐업 소식을 전하며 “기형적 도서유통 구조 때문에 ‘책을 비싸게 파는 도둑놈’ 소리를 일상적으로 들었다. 형식적 도서정가제로는 기울어진 도서유통 구조를 바로잡을 수 없었다”고 했다.

불광문고가 이날을 가만히 기다린 건 아니다. 책 판매 손실을 한때는 문구와 음반판매 수익으로 메꿨다. 직원들이 직접 동네 책 배달을 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장씨는 동료들과 함께 일본과 대만을 다니며 해외 서점 생태계를 탐구했다. 폐업 예감이 짙게 들자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할 가능성도 살폈다. 2007년 개업한 분점 ‘망원 한강문고’가 지난해 5월 문을 닫을 때 지역 시민단체는 ‘책 사주기’ 운동을 계획했다고 한다. 모두 현실에 맞지 않거나,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마지막 기대는 현 임대인에게 걸 수밖에 없게 됐다. 건물주인 한화생명에 사회공헌 차원에서 결단을 내려달라고 요구하는 주민들이 있다. 불광문고 입장에선 개운하지는 않지만 뿌리치기엔 다른 길도 딱히 보이지 않았다. 장씨가 자조를 섞어 말했다. “기업 등치려고 떼를 쓰고 있는 거죠.” 이대로면 한 주 뒤 불광문고는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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