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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 쓰고 귀농⑦

전북 장수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정지성 농부(왼쪽)가 지난 10월 26일 전북 장수 자신의 과수원에서 이재덕 기자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채용민 PD

전북 장수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정지성 농부(왼쪽)가 지난 10월 26일 전북 장수 자신의 과수원에서 이재덕 기자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채용민 PD

22년 넘게 1000회 이상 이어진 국민 드라마 <전원일기>를 아내와 두 바퀴째 ‘정주행’하고 있다. 같이 보고 있지만, 두 사람의 관전포인트는 다르다. 아내는 “도대체 저런 시댁에서 어떻게 살지?”라며 며느리에게 감정이입을 하는데, 사표 쓰고 귀농할 꿈을 꾸는 나는 극중 배우들이 직접 논을 매고, 나락을 수확하는 모습만 보인다. “20년 넘게 드라마를 찍으면서 농사일도 했으니까 진짜 농부와 진배없을 거야.”

김 회장(최불암) ‘일가’는 벼농사에 사과·배 과수원까지 한다. 수확한 사과가 저장 중 썩어버려 손해를 보기도 하고, 배를 쪼아대는 까치를 쫓아내기 위해 폭죽을 터뜨리다 이웃과 갈등을 겪기도 한다. 그 많은 등장인물들이 농사짓느라 고생하지만, 그래도 돈 걱정 안 하고 사는 집은 김 회장네뿐인 듯싶다. 지금의 과수원은 20~30년 전 드라마 속 모습과 얼마나 다를까. 부부가 땀 흘려 농사짓고 먹고살 만큼 벌 수 있다면 농촌에서도 살 만하지 않을까. 귀농 초보에게 농기계와 농지 값으로 많은 돈이 들어가 진입장벽이 높은 벼농사보다는, 땅값이 싼 산골에서 과일 농사를 짓는 게 사정이 조금 낫지 않을까. 수확이 시작된 과수원을 찾아 일손을 도우며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전북 장수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정지성 농부가 지난달 26일 빨갛게 익은 사과를 수확하고 있다 . | 채용민 PD

전북 장수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정지성 농부가 지난달 26일 빨갛게 익은 사과를 수확하고 있다 . | 채용민 PD

지난 10월26일 전북 장수 천천면을 찾아 사과 농부 정지성씨(41)를 만났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그는 2007년 이곳으로 귀농해 14년간 사과 농사를 지었다. 해발 500m쯤 되는 방아재 고개에 자리 잡은 과수원에서 골짜기 아랫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교차가 큰 산지에서 사과 농사가 더 잘된단다. “귀농하려고 돌아다니다 경관이 기가 막혀서 이곳에 왔어요. 방아재 너머에 예전에 우시장이 섰는데, 소 팔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돈을 빼앗는 도적떼가 여기 있었대요. 다들 왜 그렇게 무서운 곳에 사냐고 하더라고.” 몇 년 전, 이웃이 농사짓던 옆 과수원도 인수해 규모를 키웠고, 지금은 3만3000㎡(1만평) 농장에서 부사(후지) 사과 2000그루, 홍로 사과 1000그루를 키운다.

전북 장수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정지성 농부의 과수원. 수확을 앞둔 부사 사과나무 밑에 은색 반사필름이 깔려있다. 반사필름이 없는 나무들은 지난 9월 수확을 마친 홍로 사과다. | 채용민 PD

전북 장수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정지성 농부의 과수원. 수확을 앞둔 부사 사과나무 밑에 은색 반사필름이 깔려있다. 반사필름이 없는 나무들은 지난 9월 수확을 마친 홍로 사과다. | 채용민 PD

많은 사과 농가들이 다양한 사과 품종 중에서 부사와 홍로를 골라 심는다. 늦게 열매를 맺는 ‘만생종’인 부사는 10월 말~11월 초 수확한 뒤 저온창고에 넣어두면 이듬해 8월까지 내다 팔 수 있을 정도로 저장성이 뛰어나다. 오랜 기간 저장해도 맛이 유지되기 때문에 매년 7~8월에 나오는 파란 여름 사과 아오리가 전년 수확한 저장 부사에 밀려 제값을 받지 못할 정도다. 이 때문에 정씨도 아오리를 베어내고 부사를 늘렸다. 홍로는 9월 추석 즈음부터 한 달 동안 판매되는 사과다. 홍로는 저장 기간이 길지 않지만, 추석 대목에 선물용으로 나갈 수 있어 효자 상품으로 통한다. 국내 사과 재배면적의 대부분은 부사(61.0%, 2020년 기준)가 차지하고, 다음이 홍로(16.3%)다.

사과를 쪼아먹는 까치를 쫓아내기 위한 새 모양의 연. | 채용민 PD

사과를 쪼아먹는 까치를 쫓아내기 위한 새 모양의 연. | 채용민 PD

과수원에는 독수리, 매 같은 맹조류가 그려진 연들이 곳곳에서 날고 있었다. 사과를 쪼아대는 까치를 쫓아내기 위한 것이다. “근데 새들이 그렇게 멍청하지 않더라고…, 나중에는 연하고 같이 놀아요.” 그가 허허 웃었다. 새가 쪼아먹은 사과에는 어김없이 말벌들이 앉아 파먹고 있었다. 과수원에서 말벌들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듣는 순간 직감했다. ‘말벌 때문에라도 나는 과수원은 못하겠구나.’

이재덕 기자가 전북 장수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수확하고 있다. | 채용민 PD

이재덕 기자가 전북 장수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수확하고 있다. | 채용민 PD

■빨간 사과 만들기

“꼭지가 빠지지 않게 사과를 위로 들어 올리면서 따면 돼요.” 사과 꼭지가 떨어지면 신선도가 낮아진다고 했다. 3m가 넘는 나무에 30~40개씩 달린 사과를 따기 시작했다. 나무 아래에는 반짝이는 반사필름이 깔려 있다. “사과 열매는 햇빛을 받으면 안토시아닌이 만들어져 빨갛게 착색돼요. 착색이 잘될수록 상품 가치가 높아지죠. 햇빛이 필름에 반사돼서 사과 아랫부분까지 빨갛게 만들려는 거예요.” 홍로나 부사는 빨갛게 익을 때 가장 맛있지만, 모든 면적이 빨개야 맛있는 건 아니다. 반사필름 없이 키워 열매 아랫부분만 노랗게 익은 사과도 충분히 맛을 낸다.

“사실 필름은 안 하려고 했어요. 일회용이거든요. 버릴 때도 돈이 들고요. 그런데 안 하면 착색이 좀 덜한데, 색이 나야 소비자들이 좋아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과는 잘 안 사거든.” 사과를 새빨갛게 만들기 위해 온갖 기술이 동원된다. 열매에 햇빛이 직접 닿도록 주변 잎을 다 따주고, 열매마다 봉지를 씌웠다가 적정 시기에 벗겨낸다. 골고루 햇빛을 보도록 열매를 돌려주기도 한다.

9월 둘째주 이른 추석을 쇠었던 2019년엔 빨간빛이 덜 든 ‘홍로’를 새빨갛게 만들기 위해 모든 농가들이 바삐 움직였다. 그는 “사람을 써야지 혼자서는 못한다”고 말했다. 꼭지가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따다 보니 한 시간 동안 나무 두 그루를 채 끝내지 못했다. 농부는 어느새 몇 그루를 끝내고 저 멀리 가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하면 (인부로) 쓰지 못하겠죠?”

정지성 농부와 이재덕 기자가 사과를 수확하는 모습을 드론으로 촬영. | 채용민 PD

정지성 농부와 이재덕 기자가 사과를 수확하는 모습을 드론으로 촬영. | 채용민 PD

사과 농사는 꽃이 피는 4월부터 바쁘다. 4월 중순 홍로나무에 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꽃은 5~6개가 무더기로 나는데 하나만 남기고 꽃을 따내야 열매 하나가 크게 열린다. 미처 꽃을 따지 못한 나무에서는 사과가 5~6개씩 맺히기 시작하는데 이때 큰 놈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잘라내야 한다.

꽃을 따는 걸 ‘적화’, 맺힌 열매를 잘라내는 걸 ‘적과’라고 한다. 홍로 적화작업이 끝날 때쯤 부사나무에도 꽃이 핀다. “적화, 적과 작업은 일시에 해야 해요. 시기를 놓치면 사과가 작을뿐더러 나무가 너무 많은 사과를 키우느라 몸살이 나서 이듬해 꽃을 안 피워 버려요. ‘해거리’를 하는 거지.”

전북 장수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정지성 농부(오른쪽)가  이재덕 기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채용민 PD

전북 장수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정지성 농부(오른쪽)가 이재덕 기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채용민 PD

■양파·인삼 농가와 경쟁하는 과수원

사과를 크고 빨갛게 만드는 모든 작업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동원된다. 정지성씨는 광주, 전주, 남원 등지의 인력사무소를 통해 인부들을 구한다고 했다. “이 동네에서 저보다 젊은 사람이 별로 없어요. 과수원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60대, 70대 마을 어르신들이 일을 도와주곤 하셨는데, 이젠 그분들이 80대가 되어 일을 하실 수 없게 됐거든요.” 매년 외국인 노동자 5만여명이 국내에 들어오지만, 코로나19로 지난해 이들의 입국이 제한되면서 6000~7000명 수준으로 감소했다. 적은 수의 인력들이 중소기업과 농어촌으로 흩어지다 보니 인력난이 심화됐다.

사과 따는 모습 | 채용민 PD

사과 따는 모습 | 채용민 PD

정씨는 지난 9월 말 부사 잎 따기 작업을 위해 광주의 인력사무소에 이틀간 일할 외국인 노동자 30명을 요청했다. 일당은 인당 10만원. 잎 따는 작업에만 600만원을 쓰는 셈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전남 무안으로 갔다고 했다. 양파 모종을 밭에 아주 심는 작업에 이들이 동원된 것이다. “무안이 여기보다는 광주에서 가깝기도 하고, 일은 고되지만 그만큼 돈을 더 준다고 하니까….”

전국 사과 농가들이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경북 청송의 사과 과수원들이 적과 작업을 하는 5월 말은, 인근 의성 마늘 농가들의 마늘종 따는 때와 겹친다. 경북 영주 사과 농가들이 과수원에 반사필름을 깔아야 하는 9월은, 같은 지역 풍기 인삼 농가들의 인삼 수확철이기도 하다. 인부들은 가깝거나, 돈을 더 주거나, 노동시간이 적은 곳으로 간다. “사람은 적은데 일손이 필요한 시기가 겹치니까 그런 거죠. 조금이라도 인부들이 모이면 다행이죠.” 며칠 뒤 광주의 인력사무소가 잎 따기 작업을 할 외국인 노동자 20명을 모아 왔단다. 광주에서 이들을 싣고 온 한국인 운전기사는 “원래 인부 30명을 모아 한 사람당 1만원씩 받기로 했는데 인부가 적어 20만원밖에 벌지 못했다”며 그에게 인당 1만원씩을 더 받아갔다.

전북 장수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정지성 농부(오른쪽)가  이재덕 기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채용민 PD

전북 장수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정지성 농부(오른쪽)가 이재덕 기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채용민 PD

■일손 부족 해소될까

적화·적과 작업에 들어가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약제를 사용하는 농가들도 있다. 농촌진흥청은 일손 부족의 대안으로 적화제인 ‘석회유황합제’를 이용한 적화 기술을 보급한다. 봄철 사과꽃이 일부 피었을 때 적화제를 뿌리면 꽃의 화분이나, 암술머리에 붙어 수정이 안 되고 꽃이 떨어진다. 농진청은 석회유황합제가 곤충에 해가 없으면서도 부작용이 적고 안전성이 높은 적화제라고 소개하지만, 꽃의 수정을 방해하는 적화제의 특성상 시기를 잘 잡아 살포해야 한다.

사과의 색을 빨갛게 만드는 ‘착색제’를 사용하는 농가도 있다. 사과 색 내는 것을 도와주는 인산과 칼륨이 포함된 일종의 복합비료이지만, 일부 제품에는 과실의 노화를 촉진하는 호르몬제도 포함돼 있다. “착색제를 뿌리면 단단해야 할 사과가 물러지고, 저장성도 떨어져요. 하지만 사과 색은 빨갛게 변하죠. 인건비도 덜고 사과 농사도 쉬워지겠지만 소비자는 피해를 보고, 우리 사과 이미지도 나빠지는 거죠. 결국 그게 농가에 되돌아와요. 뭐가 옳은 건지 다시 한번 생각들을 해봐야죠.”

정부가 예방접종 등 입국 전후 방역조치를 전제로 11월 말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의 입국을 허용하기로 하면서 인력 부족 문제는 다소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 노동자가 돌아오면 좀 나아질까. 정씨에게 물었다.

“근본적으로 농촌에 사람이 없으니까 힘든 거예요. 농사를 지어서 농산물로 소득을 높여야 하는데 농산물로 소득이 안 되니까 떠나는 거죠. 그 빈틈을 외국인 노동자들이 메워주고 있죠. 지역 특성을 살리면서 농가들의 소득이 많아지면 젊은 사람이 오겠지요. 농촌에 일손이 부족한 걸 외국인 노동자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얘기예요. ‘농촌에서 결혼하면 얼마를 준다’ ‘아기를 낳으면 얼마 준다’ 그게 정책이라고 생각해요? 그 아기가 농촌에서 농사지으면서 살 수 있도록 해야 그게 정책이고 제대로 된 농정이죠.”

이재덕 기자가 전북 장수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수확하고 있다. | 채용민 PD

이재덕 기자가 전북 장수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수확하고 있다. | 채용민 PD

'사표 쓰고 귀농 시즌1 (①~⑤편)' 바로가기


글 이재덕 기자, 사진·영상 채용민·유명종 PD duk@kyunghyang.com


도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로컬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하거나, 가게를 내거나, 농사를 짓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티컬 채널 ‘밭’(facebook.com/baht.local)은 로컬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서울 말고 로컬’ 연재로 나만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acebook.com/baht.lo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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