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n번방, 남겨진 공범들(2)

“사법부는 내 편” 성범죄자의 큰소리, 빈말이 아니었다

2022.09.19 06:00 입력 2022.09.19 14:45 수정

디지털성범죄 판결문 275건 입수, 양형 분석

입영 예정자라서, 취업준비생이라서 봐준 법원

성착취물 제작·배포 1심 절반 이상 집행유예·벌금형

2020년 7월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 주최로 ‘다시 쓰는 사법정의: 성착취 장려하는 사법부 규탄 집회’가 진행됐다. / 권도현 기자

2020년 7월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 주최로 ‘다시 쓰는 사법정의: 성착취 장려하는 사법부 규탄 집회’가 진행됐다. / 권도현 기자

“영상은 알아서 퍼질 거야. 내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피해자의 신체를 촬영한 영상물을 유포하겠다며 협박하던 남성은 이렇게 말했다. 2020년 9월 남성은 카카오톡 오픈 대화방을 통해 영상을 유포했다. 피해 여성이 이에 항의하자 남성은 되레 ‘너희 가족에게도 영상을 유포하겠다’며 엄포를 놨다. 그러면서 “수사기관과 사법부는 내 편”이라고 큰소리쳤다.

“야, (영상) 다 퍼지고 나서 공권력 오면 어떻게 할 건데? 여기 한 번 올리고, 두 번 올린다고 뭐 (징역) 1년, 2년, 3년이 늘어나니? 어차피 다 똑같아.” 이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해 4월 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경향신문은 지난해 4월부터 8월 사이 전국 법원에서 선고된 성착취물 소지·유포·게시, 불법촬영, 음란물 유포 사건에 대한 1·2심 판결문 275건을 입수해 분석했다. 디지털성범죄로 묶일 수 있는 이들 사건의 판결 가운데 징역·금고 등 실형 선고는 20건(7.3%)에 불과했다. 집행유예가 61.5%(169건)를 차지했고, 벌금형 29.1%(80건), 선고유예도 2.2%(6건)로 나타났다. 법원이 선처한 피고인 중엔 아동·청소년 성착취범 조주빈이 운영한 ‘박사방’ 홍보에 가담한 남성, 성착취물 4875개를 소지하고 유포했던 남성까지도 포함돼 있었다.

디지털성범죄에 관한 사법부의 ‘솜방망이’ 판결의 문제는 이 같은 통계와 숫자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판결문의 양형사유를 살펴보면 이처럼 관대한 처벌 관행의 ‘이유’가 드러난다. 시험에 낙방해서, 유망한 학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이라서, 군무원을 준비하고 있어서, 군대 입영을 앞두고 있어서, 이미 성착취물 영상을 삭제했다거나 반성의 기미가 보여서…. 판사는 피해자가 겪은 고통이나 제2, 제3의 피해자 양산을 걱정하기보다 피고인의 미래를 더 걱정하곤 했다. 디지털성범죄자들은 이 같은 사법부의 정상참작을 등에 업고 사회로 돌아갔다.

지난 14일 발생한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피의자 전모씨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 온 것도 법원의 ‘넓은 아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은 지난해 10월 전씨에 대해 불법촬영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었다. 그러나 법원은 “주거지가 일정하고 도주 우려가 없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전씨는 서울교통공사 입사 전 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범행과는 무관한 직업 안정성이나 가해자의 사정 등이 구속·처벌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초범·반성·합의···사법부의 단골 ‘봐주기 멘트’

경향신문은 지난해 전국 법원에서 선고된 디지털성착취 관련 범죄 1·2심 판결문 275건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집행유예가 61.5%(169건), 벌금형을 포함한 재산형이 29.1%(80건)에 달했다.

경향신문은 지난해 전국 법원에서 선고된 디지털성착취 관련 범죄 1·2심 판결문 275건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집행유예가 61.5%(169건), 벌금형을 포함한 재산형이 29.1%(80건)에 달했다.

“범행을 자백하고, 반성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서울북부지법 이진영 판사는 지난해 6월 총 63회에 걸쳐 여성 60여명의 신체를 불법촬영한 A씨에게 ‘벌금 500만원’을 선고하며 이같이 밝혔다. A씨는 2020년 7월5일부터 같은달 21일까지 서울 지하철 역사에서 일면식도 없는 여성들의 신체를 지속적으로 촬영했다. 서울 노량진역에선 신발 끈을 묶는 척하며 앞에 있던 여성의 치마 속을 34초간 동영상 촬영했고, 여성의 하반신 일부만 부각해 촬영한 경우도 있었다.

A씨가 선고받은 벌금형은 징역형의 집행유예보다 낮은 형량이다. 재판부는 ‘반성의 기미를 보인다’는 이유 외에도 “형사 처벌 전력이 없다”는 점을 감경사유로 꼽았다. 초범이라는 이유인데, 판결문에 ‘성명불상 63건’으로 표기된 피해자들은 지금까지도 불법촬영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1925개를 소지했다 재판에 넘겨진 B씨도 같은 이유로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B씨는 아동·청소년 성착취범 조주빈이 검거될 무렵이던 2020년 1~2월 텔레그램에서 수천개의 성착취물을 내려받았다. B씨가 소지한 성착취물 중엔 피해자가 13세, 15세인 영상도 포함됐다. 판결문에서도 이들 영상은 피해자의 신원이 특정돼 2차 피해의 여지가 다분하다고 돼 있었다. 대구지법 박성준 판사는 지난해 6월 “피의자가 저지른 범죄는 아동·청소년의 성착취 범죄를 조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비난 가능성이 높다”고 하면서도 “다만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재범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있고, 아직까지 초범”이라며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들과 유사한 감경사유는 분석 대상이 된 275건의 판결문 대부분에 명시돼 있었다. 250건의 판결문에 피고인의 ‘반성’이 명시됐고, 동종 범행 전력이 있는 20건(7.2%)을 제외한 나머지 255건(92.7%)에는 ‘동종 전과가 없거나 초범’이라는 취지의 언급이 등장했다. ‘피해자와의 합의’는 81건(29.4%)의 판결문에 나타난 것으로 집계됐다. 대체로 A씨 사례처럼 ‘반성의 기미’만 보여도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됐으며, 전과가 있더라도 같은 죄종의 범죄가 아니라면 유리한 양형사유로 분류됐다. 유사한 범행을 저질렀던 전과자에 대해서도 ‘벌금형 처분에 불과했다’며 형량을 깎아준 경우도 있었다.

성착취물이나 불법촬영물을 ‘자발적으로 삭제했다’는 이유로 형량을 감경한 경우도 23건(8.3%)에 이르렀다. 2020년 11월 대법원 양형위원회 주관으로 개최된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안 마련 공청회’에서는 “불법촬영물을 유포하지 않은 것을 감경요소로 고려하면 범행 후 증거인멸을 위해 삭제, 폐기한 가해자들 모두가 감형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우려가 나온 바 있다. 디지털성범죄 특성상 유포 이후에는 사실상 완전 삭제나 폐기가 어렵고 또 그 여부를 검증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판사 출신 오지원 변호사(법무법인 법과치유)는 “대부분의 양형심리는 피고인의 주장에 의존해서 이뤄지고 있다”며 “주장이 고스란히 양형에 고려된다는 점이 양형기준을 심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흠결”이라고 지적했다. 오 변호사는 이어 “이번 신당역 살인사건의 피고인도 1심 선고일을 앞두고 재판부에 반성문을 몰아서 제출했다”며 “만일 재판부가 예정대로 지난 15일에 선고를 진행했다면 제출된 반성문을 고려해 감경사유로 참작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시험 낙방”“입영 앞뒀다”“유포 횟수 적다”
형량 깎아준 ‘각양각색’ 피고인 사정들

경향신문은 지난해 선고된 디지털성범죄 판결문 275건을 입수했다. 이 가운데 피고인의 감경사유로 고려된 ‘유리한 양형사유’를 분석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나이가 어려서, 입영 예정자라서, 그간 건실하게 살아왔다는 이유를 근거로 피고인의 형을 조금씩 줄여나갔다.

경향신문은 지난해 선고된 디지털성범죄 판결문 275건을 입수했다. 이 가운데 피고인의 감경사유로 고려된 ‘유리한 양형사유’를 분석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나이가 어려서, 입영 예정자라서, 그간 건실하게 살아왔다는 이유를 근거로 피고인의 형을 조금씩 줄여나갔다.

범행과 무관한 피고인의 개인 사정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주기도 한다. 서울중앙지법 유동규 판사는 지난해 4월 “피고인은 2021년 6월경 현역병으로 입영 예정인 자로, 성실히 군 복무 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며 C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C씨는 2020년 1월 말부터 6월10일까지 총 51회에 걸쳐 여성들의 치마 속을 불법촬영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부는 “상당한 기간에 걸쳐 반복해 범행을 저질렀고, 피해자들에게 불쾌감 등 정신적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악영향도 큰 점 등을 고려하면 엄벌의 필요성이 높다”고 했지만 정작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군 복무 예정이며 초범이라는 점, 촬영물의 구체적 모습 등이 감형 사유로 반영됐다.

‘수차례 시험 낙방’이 양형 사유로 등장하기도 했다. 2020년 7월16일과 19일 두 명의 여성을 쫓아다니며 다리, 가슴, 허벅지 등 신체를 불법촬영한 D씨에게 광주지법 오연수 판사는 지난해 4월 4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그러면서 “수차례의 시험 실패 및 오랜 칩거생활로 인해 발생한 우울증, 강박장애가 범행에 일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어디까지 얼마나 퍼질지 가늠하기 힘든 성착취물을 유포한 피고인에게 ‘유포 횟수가 적다’는 이유로 선처를 내린 경우도 있었다. 서울남부지법 김동현 재판장은 지난해 6월 아동·청소년이 등장하는 성착취물을 파일 공유 프로그램 ‘토렌트’를 통해 다운로드 받은 후 동일한 프로그램으로 재유포한 E씨에게 “배포한 영상의 개수가 1개에 불과하다”며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선고유예는 일정 기간 형의 선고를 유예하고, 유예 기간 동안 사고가 없으면 형의 선고를 면하게 하는 처분으로 통상 경미한 범죄에 내려진다. 광주지법 정지선 재판장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소지 및 유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F씨에게 지난해 5월 “성착취물 수량이 소지 범행에서 2개, 배포 범행에서 1개로 많지 않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디지털성범죄 특성상 온라인 상에 영상이 한번 유포될 경우, 피해 회복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한다”며 “유포 횟수가 적다고 유리한 양형사유로 보는 것은 디지털성범죄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물론 다량의 영상을 유포한 피고인과 차등을 둘 필요는 있겠지만, 굳이 한번 유포한 행위를 유리한 감경 요소로 넣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며 “판사들이 관행적으로 쓰는 문구에 피해자들은 억장이 무너지고, 상처를 받는다”고 말했다.

‘n번방 사건’ 피해자들을 대리했던 조은호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n번방 이후인) 지금도 처벌에 있어서 사법부의 변화가 체감되지는 않는다”라며 “예컨대 법원이 수백건의 성착취물을 보유하거나 유포, 시청한 피고인에게는 분명한 처벌을 내려야 하는데, 이런 범죄에 대해 다른 디지털성범죄에 비해 가볍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디지털성범죄의 피해를 축소하는 재판부의 (판결문 속) 표현은 시민들에게 성착취물을 유희거리로 승화하는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 목소리’ 배제된 피고인 중심의 재판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해 3월10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n번방’ 운영자 갓갓(본명 문형욱)의 무기징역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해 3월10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n번방’ 운영자 갓갓(본명 문형욱)의 무기징역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판결문 속 사법부의 가해자에 대한 동정적 시선은 디지털성범죄 사건 선고 관련 통계치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경향신문이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전국 법원의 최근 5년간 디지털성범죄 사건 1심 선고 결과에 따르면,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착취물 제작·배포 범죄에 대한 실형 선고 비율은 2020년 34.4%에서 지난해 14.0%로 눈에 띄게 감소했다. 같은 기간 집행유예 비중은 37.4%에서 50.4%로 13%포인트 증가했다.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기소가 늘어난 점을 감안하더라도 법원에서 그만큼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이다. 벌금형을 포함한 재산형 비중은 각각 14.7%로 같은 기간 변동이 없었고, 선고유예와 무죄 비중은 각각 0%에서 0.9%, 0.7%에서 1.9%로 다소 증가했다.

세부 범죄유형별로 불법촬영에 대한 실형 선고 비율은 2019년(17.6%)까지 10%대를 기록하다 2020년(20.0%), 2021년(22%) 20%대로 증가했다. 다만 집행유예 비율도 2017년 33.7%, 2018년 40%, 2019년 44.6%, 2020년 49.0%, 2021년 49.0%로 증가세다.

음란물 유포 혐의에 대해선 2019년을 기점으로 집행유예 선고 비중이 벌금형 등 재산형보다 높게 나타났으며,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행위에 대한 선고는 지난해 벌금형 처분 비중이 51.2%를 차지해 가장 높게 나타나는 등의 특징을 보였다.

한 일선 판사는 “불법촬영물이나 성착취물을 소지만 했던 피고인에게는 아직도 동정적인 시선이 많다”면서 “n번방 사건을 계기로 디지털성범죄 사건을 경범죄로 받아들이는 인식은 상당히 줄어들었으나, 재판부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을 마치 재판권 침해처럼 받아들이는 판사들도 있다”고 밝혔다.

류영재 대구지방법원 판사는 “(다크웹 운영자) 손정우나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사건 등을 겪으면서 판사들도 디지털성범죄를 경범죄 취급하던 분위기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성착취물을 관전만 한 사람이라도 벌금형이 아닌 그 ‘윗 단계’인 징역형 집행유예부터 선고되는 경우가 늘었다는 것이다.

판사들은 재판을 통해 피고인의 이런저런 사정을 참작하고 있지만, 그만큼 범죄피해자에 대한 고려는 없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시민사회와 여성계에서 n번방 사건 직후 외쳤던 ‘판사도 공범’이라는 구호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류 판사는 “형사재판을 할 때 판사는 피고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된다. 피고인의 책임 정도, 즉 양형을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이기 때문”이라면서도 “과연 재판부가 피해자의 서사도 같은 비중으로 들여다보고 있는지는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범죄가 피해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 재판이 과연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공정한 재판일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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