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잎 다시 살아나듯 일어난 ‘기후정의’ 시민들…“연결되고, 연대하는 시민들이 기후위기 넘는 힘”

2023.09.23 19:03 입력 2023.09.24 19:39 수정

서울 중구 시청 부근에서 23일 열린 ‘923기후정의행진’에 참석한 전북 무주 푸른꿈고등학교 학생들이 기후위기에 대한 어른들의 책임을 묻는 손팻말들을 들고 앉아 있다. 김기범기자

서울 중구 시청 부근에서 23일 열린 ‘923기후정의행진’에 참석한 전북 무주 푸른꿈고등학교 학생들이 기후위기에 대한 어른들의 책임을 묻는 손팻말들을 들고 앉아 있다. 김기범기자

23일 오후 4시쯤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과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선 귀가 떨어질 듯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난해에 이어 약 3만여명(주최측 추산) 시민이 아스팔트 길바닥에 몸을 뉘었다. 이미 일어나고 있는, 앞으로 다가올 기후 재난을 경고하며 시민들이 ‘죽은 듯한’ 모습을 표현하는 ‘다이 인(die-in)’ 퍼포먼스였다. 기후위기를 가속하는 체제를 멈추자는 의미기도 하다. 이내 울려 퍼진 퀸의 ‘위 윌 락 유’에 맞춰 일어난 시민들이 발을 굴렀다. 923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는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이라는 슬로건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23일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923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다이 인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김기범기자

23일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923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다이 인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김기범기자

이날 서울 중구 시청역·숭례문 인근에서는 청소년·대학생·시민단체·정당·노동조합 등 각계각층의 600여개 단체가 모여 만든 ‘923 기후정의행동 조직위원회’가 주최한 기후정의행진이 개최됐다. 서울에서 모인 3만여명을 비롯해 지역에서도 제주, 대전, 부산 등에서 도합 약 1000여명이 모여 별도로 행진했다.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23일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다이-인’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강한들 기자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23일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다이-인’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강한들 기자

‘심각성 공유’ 너머, 구체적인 요구로

지난해 기후정의행진에는 2019년 이후 3년 만에 열린 대규모 집회로 3만 5000여명이 모였다. 기후운동은 물론 환경 분야 집회로 최대 규모 행사였다. 지난해 행진이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기후위기에 역행하는 조치를 이어가고 있는 정부에 맞서려는 연대 의식을 확인하는 자리였다면, 올해는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요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부가 말하는 탄소중립 목표나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기후위기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행진에 참석한 청소년들은 ‘위기감’을 손팻말로 표현하고 있었다. “우리에겐 어른이 될 시간이 없어요” “기후재난으로 죽기 싫다, 생존권을 보장하라” 같은 문구들은 정부, 지자체, 기업 등으로 대표되는 어른들의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대응에 대한 불만이 점점 쌓여가고 있음을 짐작게 하는 사례들이다. 청소년 대표로 단상에 오른 전북 무주 푸른꿈고등학교 2학년 한주원군은 “우리의 힘은 서로를 돌보고, 새로운 세상을 희망하고, 생명을 되살릴 것이다“라며 ”우리의 저항, 우리의 사랑이 끝내 이기고, 기후위기 한복판에서 모두가 존엄하게 살아갈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23일 서울 시청 부근에서 열린 923기후정의행진 본집회에서 전북 무주 푸른꿈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한주원군이 청소년 대표로 단상에 올라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김기범 기자

23일 서울 시청 부근에서 열린 923기후정의행진 본집회에서 전북 무주 푸른꿈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한주원군이 청소년 대표로 단상에 올라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김기범 기자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기후정의행진에 참석한 한군은 “지금의 시스템이나 정부 대응으로는 변화를 일으키기 힘들다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참가했다”면서 “많은 이들이 모였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 부족하고, 더 많은 이들이 기후정의행진에 참석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런 행진을 언제까지 해야 세상이 바뀔지 걱정되기도 한다”라며 “기후정의행진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변화가 일어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23일 서울 시청 부근에서 열린 ‘923기후정의행진’에 참석한 전북 무주 푸른꿈고등학교 학생들이 23일 ‘바다에 버려진 것은 오염수인가 우리 미래인가’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김기범 기자

23일 서울 시청 부근에서 열린 ‘923기후정의행진’에 참석한 전북 무주 푸른꿈고등학교 학생들이 23일 ‘바다에 버려진 것은 오염수인가 우리 미래인가’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김기범 기자

이날 본집회에서는 빈민, 노동자, 환경단체 활동가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참석자들로부터 기후위기에 역행하는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분출됐다. 이날 오후 2시부터 시작된 본집회에서 권우현 조직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은 “기후위기가 일자리와 거주 공간을 위협하고 생명의 위기로 닥쳐오는 동안 정부는 스스로의 역할을 포기했다”며 “윤석열 대통령은 온실가스 뿜어대며 미국까지 날아가서는 UN 기후정상회의에는 참석도 안 했다”고 비판했다.

김영훈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한전KPS비정규직지회장은 “발전소 노동자들도 석탄화력발전소의 시대는 종식되어야 한다고 동의하지만 석탄화력발전소가 폐쇄되어도 우리의 삶이 폐쇄될 순 없다”라고 말했다. 이어 “2만5000명의 발전소 노동자가 일터가 사라지는 것을 알면서도 일하지만,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없다”라며 “환경과 사람 그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는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23일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다이-인’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강한들 기자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23일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다이-인’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강한들 기자

‘손 잡고 함께’ 행진하며 기후 정의를

오후 3시쯤부터 참가자들은 두 방향으로 나눠 서울 시내를 굽이쳐 행진했다. 한쪽은 종로 SK그룹 본사 건물과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을 거쳐 광화문 정부종합청사까지, 다른 한쪽은 서울역을 거쳐 용산 대통령실 앞까지 이동해 행진을 마무리했다.

행진 가운데에는 검은 옷을 입고, 무서운 얼굴을 한 거대한 인형도 손을 휘젓고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저승의 강 ‘스틱스’에서 망자들을 강 건너편으로 보내주는 뱃사공 ‘카론’이다. 조직위는 “기후재난과 생태파괴로 죽어간 존재, 사회적 재앙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저승의 강 ‘스틱스’에서 망자들을 강 건너편으로 보내주는 뱃사공 ‘카론’을 상징하는 인형. 강한들 기자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저승의 강 ‘스틱스’에서 망자들을 강 건너편으로 보내주는 뱃사공 ‘카론’을 상징하는 인형. 강한들 기자

어형종 두바퀴로 가는 세상 대표(54) 강원 춘천에서 온 25명 시민들과 함께 자전거를 끌고 행진에 참여했다. 강한들 기자

어형종 두바퀴로 가는 세상 대표(54) 강원 춘천에서 온 25명 시민들과 함께 자전거를 끌고 행진에 참여했다. 강한들 기자

행진에선 기후위기와 환경파괴에 책임이 있는 대상들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는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민들은 ‘정부가 기후위기 대응을 하지 않고, 거꾸로 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행진을 하며 10살 아들, 배우자와 함께 쓰레기를 줍던 박제리씨(43)는 “새만금에 짓는 공항, 재생에너지 지원이 적어지는 것 같은 것은 정부 정책이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라며 “국회도 적절한 법안을 추진해야하는데, 움직이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라고 짚었다.

정부 정책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두드러졌다. 강원 춘천에서 25명 시민들과 함께 자전거를 끌고 행진에 참여한 어형종 두 바퀴로 가는 세상 대표(54)는 “생태적인 교통수단으로서 자전거를 더 많이 지원해야 하지만, 정부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서만 정책을 펴고 있는 것 같다”라고 비판했다.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박제리씨(43)가 행진을 하며 10살 아들, 배우자와 함께 쓰레기를 줍고 있다. 강한들 기자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박제리씨(43)가 행진을 하며 10살 아들, 배우자와 함께 쓰레기를 줍고 있다. 강한들 기자

사토 다이스케 반핵아시아포럼 일본 사무국장. 강한들 기자

사토 다이스케 반핵아시아포럼 일본 사무국장. 강한들 기자

일본에서 내한한 사토 다이스케 반핵아시아포럼 일본 사무국장은 “핵발전소는 재생에너지 확대를 방해한다”라며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는 모두 핵발전소의 수명을 연장하는 등을 통해서 ‘현상 유지’만 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사토 다이스케 반핵아시아포럼 일본 사무국장(왼쪽 첫번쨰)이 23일 서울 시청역 인근에서 열린 기후정의행진 본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기범기자

사토 다이스케 반핵아시아포럼 일본 사무국장(왼쪽 첫번쨰)이 23일 서울 시청역 인근에서 열린 기후정의행진 본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기범기자

사토 사무국장은 이날 본집회에서는 단상에 올라 “일본은 오염수 해양 투기를 막지 못했다. 일본은 아시아 나라들을 침략하고 식민 지배했는데 이번에는 방사능 가해자가 되고 말았다”며 “일본인의 한사람으로서 사과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염수 해양 투기를 멈추기 위해 앞으로도 일본에서도 계속 반대하고 싸울 것”이라며 “기후위기를 빌미로 노후 핵발전소 수명을 연장하고, 신규 핵발전소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아시아 각국의 탈핵운동에도 함께 연대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참여한 보호자도 많았다. 서울 마포구 성미산학교에서 50여 명과 함께 참여한 남현우씨(44)는 “학교에서 에어컨 사용을 최대한 하지 않는데 올여름 너무 힘들었지만, 개인의 실천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미미하다”라며 “재생에너지 비율이 늘어나야 하는 것은 어린아이들도 안다. 산업 구조와 체제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 생태전환 학부모 시민행동365에서 활동하는 서재연씨(47)는 “생태전환교육 예산이 줄어든 게 우려된다”라며 “초등학교 2학년에 강의를 하는데, 아이들은 기후위기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지만, 변화를 주도해야 할 어른이 모른 척하는 게 속상하다”라고 말했다.

행진에선 기후위기와 환경파괴에 책임이 있는 대상들을 구체적으로 지목하고, 규탄하는 목소리들도 쏟아져 나왔다. 예를 들어 광화문 방향으로 행진을 이어가던 종로1가 SK그룹 건물 앞에서 멈춰 SK그룹에 석탄화력발전을 중단, 감축할 것을 요구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석탄화력발전소를 운영하는 SK를 특정해 책임을 물은 것이다. 또 행진 참가자들은 종로1가 영풍문고 앞에 멈춰서는 “환경파괴 자행하는 영풍제련소 낙동강에서 떠나라”, “환경범죄기업 비호하는 환경부 규탄한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낙동강 일대에서 심각한 하천 오염을 일으키고 있는 영풍제련소와 이 업체에 대해 조건부 운영 허가를 내준 환경부가 기후위기에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다이 인’ 퍼포먼스를 벌인 것 역시 기후위기가 전 인류와 생태계를 위협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가 태평양 생태계는 물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함을 나타내는 의미였다.

고운 서울인권영화제 활동가는 임시보호중인 반려견과 함께 행진에 참석했다. 그는 “기후정의라는 말 자체가 낯선 말이었는데 2~3년 만에 많이 알려졌다”라며 “상황이 안 좋아지는 속도도 빠르지만, 시민들이 함께 기후정의를 외치는 속도도 더 빨라지고 있다고 느낀다”라고 말했다.

923 기후정의행진의 5대요구안
1) 기후재난으로 죽지않고,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라
2) 핵발전과 화석연료로부터 공공 재생에너지로, 노동자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정의로운 전환 실현하라
3) 철도민영화를 중단하고 공공교통 확충하여, 모두의 이동권을 보장하라
4) 생태계를 파괴하고 기후위기 가속화하는, 신공항건설과 국립공원 개발사업 중단하라
5) 대기업과 부유층 등 오염자에게 책임을 묻고,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어라
자료 : 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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