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소외’ 겪는 경계선지능인…“배우고 익히면 할 수 있어요”

2024.05.10 06:00 입력 2024.05.10 11:05 수정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청년밥상문간 슬로우점 한쪽 벽에 느린학습자 직원을 응원하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김세훈 기자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청년밥상문간 슬로우점 한쪽 벽에 느린학습자 직원을 응원하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김세훈 기자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청년밥상문간 슬로우점’은 점심시간을 맞아 손님들로 붐볐다. “9번 손님, 음식 나왔습니다.” “다 드신 음식은 퇴식구에 놓아주세요.” 직원 김모씨(29)가 주문을 확인하며 테이블 사이를 분주하게 움직였다. 부엌에선 임예찬씨가 설거지한 식판을 차곡차곡 포갰다.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이곳은 여느 식당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직원들이 지능지수(IQ)가 70~85 사이인 경계선지능인(느린학습자)이라는 점이다. 서울 정릉점 다른 곳에 있는 청년밥상문간이 지역 이름을 지점명에 올린 것과 달리 슬로우점이라고 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식당 한쪽 벽에 경계선지능 직원에 대한 안내판이 걸려 있었다. 맞은편 벽에는 ‘천천히 가도 괜찮은 거야’ ‘멋지게 성장해줘서 감사하다’ 등 응원문구가 적힌 메모지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임씨는 과거 인쇄소·공장에서 일할 때 일 속도가 남들보다 느려 어려움을 겪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업무 숙달이 더뎌서라고 생각했다. 성인이 된 다음 자신이 경계선지능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임씨는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는데 한 달 일하다 보니 익숙해졌다”며 웃었다. 조재현씨(21)는 이곳이 첫 일터다. 조씨가 학습에 어려움을 겪으며 취업하려는 뜻을 접으려던 차에 복지관에서 일자리를 제안했다. 조씨는 “응대 메뉴얼을 외우는 게 어려웠는데 손님들이 많이 오면 뿌듯하다”며 “나중에는 다른 식당에서도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

‘느린 학습자’ 700만명가량…발달장애 아니지만 취업 장벽 높아

청년밥상문간 슬로우점은 지난 3월 문을 열었다. 경계선지능인 부모들이 청년밥상문간 협동조합 이사장인 이문수 신부를 찾아와 “우리 아이들이 어디에서 봉사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게 계기가 됐다. 메뉴는 김치찌개 하나이고 가격은 3000원이다. 경계선지능인들은 올 초부터 11주간 직무 교육을 받았다. 현재 10명이 임금을 받으며 이곳에서 홀서빙·식기세척 등 업무를 한다. 이 신부는 “느린학습자가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그러나 다른 경계선지능인에게 취업은 ‘언감생심’이다. 지난해 6월 국회입법조사처가 IQ분포로 추정한 국내 경계선지능인은 약 700만명이다. 전체 인구의 13.6%에 해당한다. 이들은 학습이 더딘 탓에 구직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느린학습자시민회의 ‘청년 자조모임’에 참여하는 청년 35명 중 취업한 이들은 10명 정도다. 그마저도 절반 이상이 쿠팡 등 단기 일자리라고 한다.

서울 종로구 청년밥상문간 슬로우 점에서 지난 8일 경계선지능인이자 직원인 조재현씨(오른쪽)와 임예찬씨(왼쪽)가 식기구를 닦고 있다. 김세훈 기자 이미지 크게 보기

서울 종로구 청년밥상문간 슬로우 점에서 지난 8일 경계선지능인이자 직원인 조재현씨(오른쪽)와 임예찬씨(왼쪽)가 식기구를 닦고 있다. 김세훈 기자

제도적 지원도 미비하다. IQ가 70이하면 발달장애에 해당하지만 경계선지능은 장애로 인정되지 않는다. 의무고용·취업 가산점 같은 지원은 받지 못한다. 이들에 대한 고용 통계도 따로 없다. 느린학습자시민회 관계자는 “대부분 구직 의욕은 크지만 취업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별로 없다”면서 “직장을 구해도 다른 직원과의 관계 설정에 어려움을 겪는 등의 이유로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조기 진단 받고, 관심 분야 집중하면 제몫” …직업교육 등 지원 필요

경계선지능 자녀를 두고 있는 부모들은 맞춤형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홍세영씨 딸 김모씨(21)는 초등학생 때 느린학습자 진단을 받았다. 홍씨는 딸이 일반 학생과 동등한 수준으로 교육받기 어렵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대신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해줬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는 딸에게 일본어 공부를 권유했다. 현재 김씨는 전문대 일본어비즈니스학과를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홍씨는 “조기에 진단을 받고 본인이 잘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하면 느린학습자도 사회에서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고등학교 2학년 경계선지능 자녀를 둔 송연숙 느린학습자시민회 대표도 자녀에게 미술·영상 애니메이션 분야 경험을 쌓아주고 있다. 송 대표는 “아이의 관심사를 찾고, 진로를 설정하면서 나도 아이를 더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최근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경계선지능인 취업·교육지원에 나서기 시작했다. 2022년 설립된 서울특별시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 지원센터는 올해부터 맞춤형 일자리 제공을 위한 일·경험 시범사업을 진행 중이다. 권소현 자립지원팀장은 “부모들도 경계선지능이라는 개념을 잘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심리검사 등을 통해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들은 반복 학습이 남들보다 더 필요한 만큼 조기 진단을 위한 제도가 뒷받침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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