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김재규의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해 1980년 5월 사형당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호인이었던 안동일 변호사는 “10·26사건은 보안사가 처음 수사하고 합동수사본부장을 전두환이 맡아 재판에 관여하면서 역사의 비극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10·26 재판은 한마디로 개판으로 진행돼 형사소송의 절차적 정의는 깡그리 무시되고, 당사자의 방어권과 변호인의 변호권은 설 자리가 없었다”고 했다. 서성일 선임기자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해 1980년 5월 사형당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호인이었던 안동일 변호사는 “10·26사건은 보안사가 처음 수사하고 합동수사본부장을 전두환이 맡아 재판에 관여하면서 역사의 비극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10·26 재판은 한마디로 개판으로 진행돼 형사소송의 절차적 정의는 깡그리 무시되고, 당사자의 방어권과 변호인의 변호권은 설 자리가 없었다”고 했다. 서성일 선임기자

극악한 고문으로 시작한 군법회의, 재판 도청하고 재판부에 쪽지…방어권·변호권 빼앗고 ‘속전속결’
휴정 때 법무관실 불려갔더니 보안사 준장이 ‘국선이 왜 그렇게 열심히 해, 손 좀 봐야겠다’며 겁박
보도지침대로 그를 패륜범으로 몰고 간 언론의 책임 커…YS·DJ 쪽도 구명운동 동참 요구 거절

자신보다 부하들 변론 부탁하던 모습 선해…성삼문도 250년 뒤에야 사육신 인정, 김재규의 재평가 확신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10·26이 없었다고 상상해보라, 12일 재심 개시 심문기일서 진실 증언할 것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김재규의 법정 최후진술)

1979년 10월26일 오후 7시40분경 서울 궁정동 대통령 안가(安家)에서 수 발의 총성이 울렸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53)가 연회 중이던 박정희 대통령(62)과 차지철 경호실장(45)을 총살했다. 박선호(45·중앙정보부 의전과장)·박흥주(39·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이기주(중앙정보부 경비원) 등 부하직원 다섯 명이 가담했다. 경비원 4명도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속전속결 재판을 거쳐 ‘내란목적살인’ ‘내란수괴미수’ 등 혐의로 이듬해 봄 모두 최종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45년 전 10·26 사건이 다시 법정을 달구고 있다. 김재규의 셋째 여동생 정숙씨(85)가 2020년 10·26 재판 과정이 담긴 육성테이프가 공개된 것을 계기로 재심을 청구한 지 4년 만에 법원이 재심 개시 여부 결정을 위한 심문기일을 진행하고 있어서다. 지난 4월17일에 이어 오는 6월12일 두번째 심문기일을 연다. 증인으로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안동일 변호사(84)가 나선다. 그는 170일간 진행된 재판 과정을 꼼꼼히 기록해 그것을 기반으로 2005년 <10·26은 아직도 살아 있다>와 2017년 개정증보판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를 펴내기도 했다.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서소문동 배재빌딩 사무실에서 안동일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6월12일 법정에서 10·26의 진실과 당시 재판의 위법성 및 부당성을 증언하겠다”고 말했다.

군사법정에 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그는 시종일관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거사했다’고 주장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군사법정에 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그는 시종일관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거사했다’고 주장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재심 개시 여부가 곧 결론나는데 김재규의 변호인으로서 소회가 어떤가요.

“약 반세기가 지나도록 10·26 재판의 역사적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어요. 지난 금요일(5월24일)이 김재규 부장의 기일이었어요. 김 부장과 박흥주 대령·박선주 과장 등 여섯 분의 합동추모제가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렸는데, 지금도 내 주변에서조차 대통령을 시해한 패륜아를 왜 추모하느냐고 힐난하는 분위기죠. 언론 책임이 큽니다. 당시 보도지침에 의해 합수부가 발표한 것만 받아쓰면서 김 부장을 파렴치한이자 부정축재자, 여성편력자로 매도했으니까요. 더 늦기 전에 역사적 진실을 알려야 해요.”

- 민주화 이후 왜 재평가 작업에 나서지 않았습니까.

“군사정권 32년(박정희 18년, 전두환·노태우 14년)의 적폐와 유산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김영삼은 3당 합당으로, 김대중은 DJP연합으로 집권해 군사정권의 유얼(遺孼·뒤에 남은 나쁜 사물)과 동침했어요. 지금도 그 영향이 계속되고 있다고 봐요. 생전 (강)신옥형이 자주 하신 말씀이지만, 성삼문 같은 사육신도 250년이 지난 후에야 충신으로 인정받았듯이 김재규 부장도 반드시 역사의 재평가를 받을 것이라 믿어요.”

- 이번에 재심 개시 결정이 나올 것으로 봅니까.

“예단은 어렵지만, 기대는 하고 있죠. 적어도 44년 전 군법회의(현 군사법원)에서 절차적 정당성이 없는 위법부당한 재판을 했다는 점, 국헌 문란 목적이 없고 집단적 폭동도 아니었기에 ‘내란목적살인’이 아니라는 점, 유신 철폐와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부득이한 ‘저항권’이었다는 점에 대한 사법부 판단을 주목해요.”

- 6월12일 심문기일에 어떤 증언을 하나요.

“1심부터 3심까지 재판을 빠짐없이 지켜본 역사적 현장의 증인으로서 10·26의 진실과 당시 재판의 위법성 및 부당성을 증언할 겁니다.”

10·26사건 12일 뒤인 11월7일 공개된 현장검증. 차지철 경호실장을 향해 권총 한 발을 쏜 김재규가 앞에 앉아있던 박 대통령을 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0·26사건 12일 뒤인 11월7일 공개된 현장검증. 차지철 경호실장을 향해 권총 한 발을 쏜 김재규가 앞에 앉아있던 박 대통령을 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0·26 사건 당시 김재규는 박 대통령 시해 직후 박흥주와 현장을 떠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김정섭 중앙정보부 2차장보와 함께 육군본부로 갔다. 그사이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은 이미 사망한 박 대통령을 국군서울병원으로 옮겼고, 이 첩보를 가장 먼저 청취한 보안사령부는 10월27일 김재규 등을 체포했다. 김재규에 대한 1심 재판은 17일, 2심 재판은 7일 만에 끝나 불과 6~7개월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 45년 전, 어떻게 김재규의 변호를 맡게 됐습니까.

“나는 처음에 김재규·박흥주·이기주·유성옥의 국선변호인으로 지정됐어요. 재판이 시작되면서 김재규·박흥주는 사선변호인을 선임했죠. 하지만 김재규가 4차 공판 때 갑자기 21명의 사선변호인 변호를 거부하고 국선변호만 받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이기주·유성옥의 국선변호인으로 법정에 나와 있던 내가 다시 김재규의 국선변호인으로 지정된 거예요.”

- 긴급조치 사건을 주로 변론해온 인권변호사를 왜 김재규의 국선변호인으로 지정했을까요.

“내가 군 법무관 1기 회장이었어요. 군사법원에서 하는 재판이니 내게 맡긴 것으로 짐작했어요.”

- 김재규는 왜 1심에선 사선변호인단의 조력을 거부했다가 2심에선 7명으로 구성된 사선변호인단을 받아들인 건가요.

“1심 일부 사선변호인이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 같아요. 민주혁명의 원형으로서의 의미가 훼손되는 것 같아 거부했다고 말했어요. 그러다 나의 1심 변론을 지켜보며 2심도 맡아달라고 부탁했어요. 그게 가능하려면 사선변호인으로 선임돼야 했고, 저 혼자선 역부족이라고 판단해 선배 변호사 여섯 분(김제형, 이돈명, 강신옥, 조준희, 홍성우, 황인철)과 함께 무료 사선변호인단을 구성한 거예요.”

- 변호인으로서 김재규를 정식으로 처음 접견한 것은 1심 4차 공판이 있던 12월11일 밤 9시경이라죠. 첫인상이 어떻던가요.

“심각한 간경변과 모진 고문(전신 구타와 전기고문)의 후유증으로 얼굴 등 피부가 검붉었어요. 하지만 시종 무인답지 않은 온화한 표정이었어요.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그를 유신체제의 주구이자 절대권력의 2인자로만 생각해 반감과 불신, 멸시의 감정이 컸죠. 그래서 대통령과 만찬 중 욱해서 우발적으로 대통령을 시해했을 거라 짐작했고, 법정에서 그의 주장을 들으면서도 진실이라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접견 후 마음이 크게 동요했어요. 그의 주장을 적극 변론하겠다고 결심했죠.”

- 이유는요.

“진술의 진정성과 애국충정을 강렬하게 느꼈기 때문이에요. 그는 유신 철폐를 절체절명의 구국적 과제로 생각했고, 유신의 핵인 박정희를 제거해 민주주의를 회복하면 전 국민이 일어나 열렬히 환영할 것으로 믿었다고 말했어요. 박 정권에 대한 미국 정부의 불신이 위험수위에 달했다는 점도 지적했고요. 특히 단주를 쥔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으며 부하들은 죄가 없다며 자신의 변론보다 부하들에 대한 변론을 간곡히 부탁하는 모습을 잊지 못해요. 부하들 역시 목숨이 촌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김 부장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재판 내내 피력했습니다.”

- 정권 탈취 뜻은 전혀 없이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목적으로 10·26을 일으켰다는 김재규의 주장을 신뢰하게 된 거군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어요. 그는 직접 쓴 항소이유보충서에도 10·26의 필연성과 적시성을 언급했죠. 유신은 박 대통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박 대통령의 생명을 끊지 않고선 유신 철폐가 불가한 것이기에, 자유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대의(大義)를 위해 대통령에 대한 의리라는 소의(小義)를 버려야 했다고 주장했어요. 또 자신이 부마항쟁 현장을 암행한 후 그 심각성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정부가 개선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청했음에도 박 대통령은 오히려 직접 발포명령을 하겠다고 했어요. 차지철은 한술 더 떠 캄보디아에선 300만 정도 죽여도 끄떡없었는데 데모대원 100만~200만 정도 죽여도 걱정 없다는 말을 했고요. 그걸 보며 때를 놓치면 더 많은 국민들의 희생이 불가피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거예요.”

- 김재규는 유신체제 유지에 앞장서온 중앙정보부 수장이에요. 모순되는 주장 아닌가요.

“물론 유신체제 유지를 위해 중정이 중심이 돼 여러 정치공작을 하고, 수많은 반체제 인사를 처단한 잘못이 있죠. 그러나 남몰래 민주체제 회복을 위해 강압적이거나 순리적인 방법 등을 모색하며 실행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고 해요.”

현장검증 장소에서 만난 김재규와 부하인 김흥수. 김재규가 팔에 관통상을 입고 화장실로 피신한 차지철을 다시 쏘려고 했으나 격발이 되지않자 김흥수에게 권총을 달라고 외친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현장검증 장소에서 만난 김재규와 부하인 김흥수. 김재규가 팔에 관통상을 입고 화장실로 피신한 차지철을 다시 쏘려고 했으나 격발이 되지않자 김흥수에게 권총을 달라고 외친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재규는 10·26 이전에도 세 차례 박 대통령 시해를 준비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3군단장이던 시절 박 대통령이 부대를 방문했을 때 연금시켜 대통령직에서 하야시키려고 했다가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1974년 9월 건설부 장관으로 사령장을 받는 자리에서 권총으로 박 대통령을 사살하고 자신도 자결하려고 했다가 접었다고 했다. 이때는 유서까지 써놓았다고 주장했다. 이듬해 정월 27일경에도 준비했다가 포기했다고 한다. 이후 1976년 12월4일 중정부장으로 발령받고는 무척 기뻤는데, 물리적 방법이 아닌 순리적 방법으로 유신체제를 고쳐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체제 완화 뜻이 없었다.

- 김재규는 충직한 부하인 박흥주·박선호에게도 거사 계획을 미리 밝히지 않았어요. 또 박 대통령 시해 후 육본으로 떠나면서 현장에 남은 부하들에게 아무 지시를 내리지 않았죠. 그 결과 김계원 실장에 의해 박 대통령의 시신이 밖으로 나가면서 보안사에 체포됐고요. 오랫동안 거사를 준비했다고 하기엔 너무 허술합니다.

“부하들과 사전에 교감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보안 유지를 위함이고, 둘째, 혁명주체를 따로 조직하지 않고 기존 체제를 그대로 운영하여 혁명과업을 수행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게 본인 주장이었어요. 또 김계원 실장 역시 보안을 지켜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해요.”

- 당시 절차적 정당성이 없는 위법부당한 재판을 했다는 근거는 뭔가요.

“합동수사본부라 함은 검·경·군이 합동으로 수사를 하고 검찰이 지휘권을 갖는 게 통상적이죠. 그런데 10·26의 경우는 보안사가 처음 수사를 하고 합동수사본부장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맡아 재판에 관여하면서 역사의 비극이 시작됐어요. 수사는 극악한 고문으로 시작됐고, 보안사 시간표에 따른 재판 진행은 한마디로 개판이었죠. 형사소송의 절차적 정의는 깡그리 무시되고, 당사자의 방어권과 변호인의 변호권은 설 자리가 없었어요. 특히 매일 재판에 야간 재판까지 초스피드로 진행돼 대법 판결까지 170일 만에 끝났어요. 대법 선고 후 나흘 만에 사형을 집행했고요.”

- 보안사에 의해 재판 과정이 불법녹음되고, 보안사 직원들에 의해 재판부에 쪽지가 전달되는 일이 빈번했다죠.

“재판 도중 재판관석 뒤쪽 옆문을 통해 누군가가 재판부에 쪽지를 전달하려 들락날락하는 게 수시로 보였어요. 알고보니 재판부 출입문 바로 앞방에 위치한 법무감 집무실에 보안사 남모 준장을 위시하여 파견 나온 판검사들, 그리고 합수부 요원들이 모여 재판 진행 상황을 엿듣고 지시사항을 쪽지에 적어 재판부에 전달한 거예요. 1심 공판 때 그 방에 불려가 협박을 당하면서 직접 목격한 일이에요.”

- 어떻게요.

“휴정 후 나를 그 방으로 불러서 갔더니 담배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법무감이 앉는 상석에 같은 원스타인 남 준장이 앉아 있었어요. 그가 대뜸 ‘국선이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요? 손 좀 봐야겠어. 빙고호텔(서빙고 대공분실)에 데려가지’ 하더라고요. 내가 ‘법에 따라 변론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는 게 뭐가 문제입니까?’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스피커에서 ‘개정합니다’라는 법정 안내멘트가 들렸어요. 재판 과정이 실시간으로 스피커를 통해 법무감 집무실에 중계되고, 이걸 계엄사 합수부 요원들이 들으면서 쪽지를 보내는 거죠.”

1979년 12월20일 사형이 선고된 1심(육본 계엄 보통군법회의) 선거공판 모습. 앞줄 왼쪽부터 김재규, 박흥주, 김계원(헌병이 좌우로 서 있다). 뒷줄 왼쪽부터 박선호,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유석술(교도관이 좌우로 서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9년 12월20일 사형이 선고된 1심(육본 계엄 보통군법회의) 선거공판 모습. 앞줄 왼쪽부터 김재규, 박흥주, 김계원(헌병이 좌우로 서 있다). 뒷줄 왼쪽부터 박선호,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유석술(교도관이 좌우로 서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보안사가 도청해 녹음한 테이프는 비밀에 부쳐졌다가 1994년 5월 당시 동아일보 김재홍 기자(전 국회의원)에 의해 <박정희 살해사건 비공개진술 전 녹음 최초정리> 상·하권으로 출판돼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2020년에는 JTBC 봉지욱 기자(현 뉴스타파 기자)가 과거 군사법정에서 활동한 군 관계자로부터 육성테이프 53개 전체를 입수해 보도했다. 이를 통해 당시 공판조서의 허위가 드러나면서 유족은 재심 근거를 마련했다.

- 변호인들은 재판 과정에서 공판조서를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알아요. 공판조서 기록은 실제와 얼마나 다릅니까.

“원래 공판조서는 다음 재판 전에 열람이나 등사할 수 있도록 해 조서에 이의가 있을 때 이의조서를 첨부토록 해야 정상이에요. 그런데 10·26 재판의 경우 매일 재판을 하니 입회서기가 공판조서를 제때 작성하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죠. 재판이 끝날 때까지도 작성이 안 됐어요. 이후 확인한 공판조서에는 요점만 간략히 기록돼 있고, 피고인이나 변호인의 진술 중 피고인에게 유리한 부분은 줄이거나 아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 신군부가 재판을 속전속결로 한 이유가 뭐라 생각합니까.

“신군부의 속셈은 1심 4차 공판 이튿날 발생한 12·12로 드러났죠. 정권을 잡는 데 방해될 요소는 제거하려 한 거예요. 10·26 사건 관련 피고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해 원심 형량대로 확정한 대법 판결이 있고 나서 나흘 만에 사형 집행을 한 것도 그런 이유죠. 또 재판 내용이 외부로 흘러나갈까봐 대법 선고가 있던 날 바로 7명의 변호인을 잡아들이려 한 거 아니겠어요? 대법원을 나서는데 보안사 법무관이던 후배가 쫓아나와 ‘형, 체포명령 내려졌으니 피하세요’라고 알려줘 겨우 피신했어요. 신옥형은 잠깐 사무실에 들렀다가 잡혀 끌려갔고요.”

1980년 1월 서울 고등군사재판소, 항소심 공판정에서 진술하고 있는 김재규.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 1월 서울 고등군사재판소, 항소심 공판정에서 진술하고 있는 김재규.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내란목적살인죄의 성립 여부를 두고 8 대 6으로 6명의 반대의견이 있었지만 보도지침에 의해 보도되지 않았다. 소수의견을 낸 민문기 등 대법원 판사는 이후 3개월도 못 돼 신군부 압력으로 모두 사표를 내고 대법원을 떠나야 했다. 양병호 전 대법관은 “1980년 1월 말 보안사 2인자라는 사람으로부터 김재규 내란음모 사건의 상고기각을 요청받았다”며 “(이후) 소수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1980년 8월경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돼 3일간 밀폐된 공간에 감금당한 채 사표를 쓸 것을 강요당했다”고 증언했다.

- 재판 시작과 동시에 김재규와 가담자들에 대한 구명운동이 일었지만 실패로 끝난 이유는 뭔가요.

“당시 윤보선 전 대통령 내외분이 적극적인 구명운동의 중심에 계셨고, 종교계·언론계·학계·문화계 등에서 구명운동이 있었지만 일반인에게는 파급되지 못했어요. 비상계엄하의 언론검열로 10·26 결행의 진의와 역사적 진실이 전혀 보도되지 않고, 김재규 부장을 ‘주군을 시해한 패륜범’으로만 보도함으로써 팩트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또 당시 국민감정이 대통령 죽음이라는 감상에 빠져 있었고요. 게다가 YS, DJ 측은 적극적인 움직임은커녕 (구명운동에 동참해달라는) 변호인들의 요구도 거절했죠.”

- YS와 DJ는 왜 그랬을까요.

“가만히 있으면 자기들이 대통령이 될 것으로 생각했겠죠.”

- 김재규는 대법원 선고로 상고가 기각된 직후 위로차 찾아간 사람들에게 ‘현재는 10·26사태라고 하지만, 언젠가는 10·26혁명이라 부를 것이고, 헌법의 전문에 4·19와 함께 10·26혁명 정신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죠.

“개인적으로 ‘혁명’이라는 용어는 찬성하지 않지만, 혁명적 변환이었음은 분명해요. 10·26 이후 바로 최규하 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를 해제했고 곧 유신헌법을 개정한다고 천명했으며, 정치권이 여야를 막론하고 모두 이에 호응했으니까요. 그래서 김재규는 10·26은 성공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고, 거기에 대해선 나도 동감하죠. 다만 12·12에 이은 전두환의 집권으로 80년 민주화의 봄이 다시 군사정권하의 동토(凍土)로 돌아간 거예요.”

- 만약 10·26이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달라졌을까요.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10·26이 없었다면 유신체제와 박정희의 말로는 어찌 됐을지 상상해보세요. 많은 국민들의 희생 끝에 박정희의 최후도 추했을 거예요. 오히려 박정희는 김재규가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어줬다고 하늘에서 고마워했을 겁니다.”

김재규는 사형 집행 전날 녹음기에 이렇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나는 이 사건으로 1심에서 3심까지 재판을 받았지만, 또 한 차례 재판이 남아 있다. (중략) 하늘의 심판인 역사의 4심에서는 나는 이미 승리자이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은 땅에서의 재판을 그리고 역사적 평가를 다시 한번 받게 될 것인가.

박주연 논설위원

박주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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