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피아] 🎓가성비 시대의 안목 : 이케아 미니멀리즘과 다이소

인스피아

🎓가성비 시대의 안목 : 이케아 미니멀리즘과 다이소

19분 2023.11.15

미니멀리즘 가성비 다이소 안목 플렉스

가성비 시대의 안목 : ‘이케아 미니멀리즘’과 다이소

IKEA minimulism and DAISO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105), 2023.11.15,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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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미니멀리즘, 가성비, 다이소, 안목, 플렉스

1.머리말
2.삶 없는 집 : 발 없는 새와 ‘이케아 미니멀리즘’
3.‘생활명품’ vs 다이소
4.안목은 ‘플렉스’에서 나오지 않는다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연구자님은 다이소에 자주 들르시는 편인가요? 저는 집과 회사 근처에 커다란 다이소 매장이 있어서 자주 다닙니다. 갈 때마다 반드시 무언가 집어들고 나오게 됩니다.

‘천원의 행복’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잡화점 다이소가 올해 ‘3조 매출’ 달성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링크) 사람들은 주방용품, 생필품, 화장품 등을 다이소에서 일상적으로 사게 됐습니다.

“월급만 빼고 모두 오르는 시대”에 부담없이 무엇이든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은 큰 매력이죠. 저는 생필품 뿐 아니라 깻잎 씨앗, 장난감, LED 전구 등처럼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소소하게 구입하고 싶은’ 잡동사니들도 상당수 다이소에서 쉽게 사곤 합니다.

최근엔 다이소에서 겨울용 플리스(링크)까지 판매하게 되어서 ‘유통 블랙홀’ 효과가 예상된다고 하는데요. 사람들은 5000원이라는 가격에 깜짝 놀라면서도, “여차하면 싸게 한철 입고서 버릴 수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12일 다이소는 올 겨울 매장에서 발열내의, 플리스도 판매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가격은 5000원입니다. 여타 SPA브랜드 유사 제품 값의 거의 10분의 1 수준이죠. (왼쪽) '뭐라해도 이게 찐 가성비지!'라는 문구와 함께 다이소 신제품을 소개하고 있는 생활유튜브입니다. / 다이소, 살림남 유튜브

미니멀리즘, 가성비의 시대입니다.

물건에 대한 욕심, ‘고집(안목)’이 없고 무던할수록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야 대량생산 시대의 ‘가성비’에 맞춰 할인상품을 잘 먹고, 아무 물건이나 써도 별 불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 ‘무던함의 끝판왕’이라고 할만큼 안목이 없는 편인데요. 절약정신이라기보단 귀차니즘에 가깝습니다. 대체로 아무거나 잘 먹고 잘 씁니다. 무료로 받은 필기구도 많이 쓰고, 가구는 이케아에서 한번에 샀고, 웬만해서 줄 서는 맛집엔 가지 않습니다. 물건에 대한 집착도 크지 않아, 버릴 땐 쉽게 버리는 편입니다.

저는 내심 그런 저의 성정을 기껍게 생각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는 편이 돈도 자연히 절약되고, ‘쓸데없는 데’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으니까요. 비의도적 짠테크랄까요.

하지만 가끔 이런 삶의 태도는 - 그냥 테트리스처럼 맞는 자리에 꼭 박혀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나무토막처럼 무뚝뚝하게 만든 결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문득 곰곰 생각해보았습니다.

과연 이처럼 물건에 대한 안목이 없이 가성비만 따지는 것이 내 삶에도 ‘긍정적’인 것일까? 주위에 10년 쓴 물건조차 찾아보기 힘든 나는, 삶을 빌린 것처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정말 물욕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단념했을 뿐일까? ‘안목’이라는 걸 어떻게하면 얻을 수 있는 걸까?...

오늘 레터에선 <단순한 열망>(카일 차이카) <윤광준의 생활명품 101>(윤광준) 등을 지팡이 삼아 미니멀리즘과 안목에 대해 해찰해볼까 합니다.

【2.삶 없는 집 : 발 없는 새와 ‘이케아 미니멀리즘’】

연구자님은 ‘미니멀리즘’하면 어떤 느낌이 떠오르시나요?

새하얀 벽에 최소한의 멋스러운 가구를 놓은 인테리어 잡지, 앱에 등장하는 비슷한 방들이 떠오르실텐데요. 이런 공간들의 공통점은 가구가 적다는 것 외에도 또 있습니다.

대체로 거주자의 개성이나 생활감이 거의 없다는 점이죠. 마치 호텔방처럼요.

일본의 프로듀서, 작가 후지오카 미나미(藤岡みなみ)는 과거 독특한 미니멀리즘 실험에 도전한 일이 있습니다.

마치 로빈슨 크루소처럼(?) 100일동안 아무것도 없는 하얀 '빈 방'에 똑 떨어져, 하루에 물건 단 하나씩만을 얻는 실험이었죠. 이 시도는 <사는 데 꼭 필요한 101가지 물건>이라는 책으로도 출간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고요. 통상 미니멀리즘이 잔뜩 쌓여있는 데서 버려나간다면, 이 경우는 거꾸로 비어있는 데서 하나씩 간절한 물건들을 얻는 방식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어!'라며 깜짝 놀라게 되는데요.

하지만 이 실험의 진짜 재밌는 부분은, 우선 이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점입니다. 왜냐면 처음부터 이 실험에서 속옷이나 휴지, 양말, 건전지, 비닐봉투, 식재료 등 대부분의 '생필품'은 모두 처음부터 '셈을 안하기로'(그냥 제공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1) 그리고 저는 이 '치트키 설정'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까지 포함해 흥미로웠습니다.

이 때문에(=생필품을 제외했기 때문에) 리스트엔 미니멀리즘이 그렇게 경계하는 쓰잘데없는 잡동사니(?)들도 꽤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VR 고글, 보드게임, 두반장 등입니다. 그는 "처음엔 101개를 채우는 게 금방일 줄알았는데 101개를 채우는 것이 어려웠다"고 했는데요. 저 또한 당시 리스트를 만들어봤는데, 30개 정도를 넘어가니 도저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나머지를 다 책과 과자로 채워버리고 말았습니다.(혹시 100일 중에 크리스마스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트리도 하나 넣었습니다)

후지오카 미나미가 100일 간 미니멀리즘 삶 챌린지를 한 6평짜리 방.(왼쪽) <사는 데 꼭 필요한 101가지 물건> / roomie, 쌤앤파커스

저는 후지오카 미나미의 실험이 여러모로 '미니멀리즘 트렌드'에 대한 환상을 핵심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는데요. 극단적으로 생활감이 지워지는 종류의 미니멀리즘입니다.

<단순한 열망>은 예술 평론가인 카일 차이카가 1960년대의 미니멀리즘 예술 사조와 오늘날의 ‘미니멀리즘 트렌드’를 비교해보는 책인데요.

이 책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오늘날의 ‘미니멀리즘 트렌드’에 대한 표면적 진단을 넘어, 그 아래 구조적 부분을 짚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단순한 열망>을 펼쳐들고, 과연 ‘생활감’이 지워진 미니멀리즘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그런 ‘미니멀리즘’을 찬양할 때 간과하는 부분은 없을까? 등의 궁금증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궁리해볼 수 있었습니다.

책 <단순한 열망:미니멀리즘 탐구> 표지(왼쪽) '미니멀리즘'하면 떠오르곤 하는 새하얀 방의 모습. / 필로우, Adobe stock

이 책에서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미니멀리즘’이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새하얀 무균실’)가 ‘허울’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원래 미니멀리즘 예술가들이 추구했던 가치와 정반대가 되어버렸다는 거죠.

저자에 따르면 미니멀리즘 예술가들은 결코 어떤 작품이나 공간에서 ‘사람 냄새’를 죄 빼버리거나, 어수선하고 쓸모없는 것들을 모조리 휴지통에 넣은 ‘무균실’을 만들자고 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불청객이 방문하고 우연이 일어날 수 있도록 열린 공간, 머무르는 사람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소박한 공간 등을 만들려고 했죠.

예를 들어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워낙 유명한 음악(!)이라 연구자님들도 잘 아실텐데요.(영상) 이 곡은 ‘4분 33초 동안 아무런 연주도 없는’ 음악이죠. 존 케이지는 이 ‘침묵’을 통해 오히려 사람들의 기침이나 꼼지락대는 소리 등 주변의 소리를 주인공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얼핏 이는 ‘노이즈캔슬링(Noise Canceling·외부 잡음을 차단하는 음향 기술)’과 비슷해보이지만, 정반대입니다.

이를 공간으로 상상해보자면, 오히려 잘 정돈된 새하얀 방이라기보다는 숲에 세워진 뼈대밖에 없는 집(?)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기도 했고요. 동네 아이들과 벌레, 새들이 잔뜩 드나들 수 있는 그런 곳이요.

미니멀리즘 예술가 도널드 저드(1928~94)는 예술 작업실들이 ‘무색무취한 미니멀리즘st’로 똑같아지고 있다며 좌절하기도 했다고 하죠.

화이트 큐브는 21세기에 인기를 얻은 미니멀리즘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여백이 많은 인테리어는 소비주의를 부정하는 동시에 강화한다[...]저드는 당시 소호가 균질해지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끔찍합니다[...]내가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예요” 그 대신 저드는 낡은 흰색 랜드로버를 타고 길 위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멕시코의 바하칼리포르니아에서 캠핑하면서 그곳에 새 작업실을 지으면 어떨지 고민했다.

-카일 차이카, <단순한 열망:미니멀리즘 탐구>(이하 동일)

또한 저자는 이 책에서 ‘상업적 미니멀리즘 트렌드’를 크게 두 갈래에서 바라보는데요.

핵심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단을 소개해보겠습니다.

미니멀리즘 마케팅은 대개 두갈래 방향 중 하나로 흐르는데, 이상적인 면에서는 결국 둘다 실패한다. 첫째 갈래는 값비싼 사치품으로서의 미니멀리즘이다. 1000달러짜리 아이폰이나 임스 라운지체어가 그 예다[...]이 의자는 고급스러운 취향을 대변하는 요소로 여러 화보에 늘 등장하는 클리셰같은 존재가 되었다[...]둘째 갈래는 이케아의 미니멀리즘이다. 사회 초년생들은 너나없이 이케아에서 똑같은 기하하적 형태의 사이드 테이블을 산다. 조잡한 자재를 써서 모더니즘 스타일을 흉내 냈을 이케아의 가구들은 주인이 더 좋은 가구를 살 형편이 되면 바로 버림받는 신세가 된다.

‘미니멀리즘이라고 다 똑같은 미니멀리즘은 아니다!’라는 건데요. 저자가 소개한 두 가지 미니멀리즘의 특징을 정리해보면 이 정도가 될 수 있겠죠.

1) ‘이케아 미니멀리즘’ : 정말로 여유가 없어서, 선택지가 없는 무소유
2) ‘사치재 미니멀리즘’ : 삶의 흔적이 없는, 사치재로서의 미니멀리즘

우선 ‘이케아 미니멀리즘’이라는 말에 대해 해찰해봅니다.

우리나라 도시 1인 가구들의 대체적인 상황과 비슷할텐데요. 어차피 금세 이사를 가야 하고, 비싸고 훌륭한 가구를 갖출만한 공간도 없으며, 이사 비용이 올라갈만한 구실(=무겁고 거창한 가구, 흡집이 잘 나는 까다로운 가구)은 대체로 만들지 않습니다. ‘발 없는 새’처럼, 머무른 온기와 취향을 남기지 않는 삶입니다.

요샌 아예 젊은 세대들 사이 빌트인 가구 뿐 아니라 청소, 요리 등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호텔식 레지던스’가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고요.

저자인 카일 차이카 역시, 사회 초년생 시절 처음 뉴욕으로 올라와 어쩔수 없이 ‘강제된 미니멀리즘’2)을 실천해야만했던 시기를 회상합니다.

그때 이케아에서 산 가구는 거의 일회용에 가까웠고 무릇 내 소유의 물건이라면 들고 다닐 수 있어야 했다. 나는 새 집을 구할 때마다 마치 금방이라도 떠나야 하는 사람이 머무는 호텔 방처럼 꾸며놓고 살았다[...]내 소유의 물건이 몇개나 되는지 셀 수 있을 정도였다[...]넓은 공간이 허락될 만큼 부자도 아니고 창의적이지도 못한 사람이 뉴욕에서 살아가려면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좁은 공간이 터져나갈 듯 꽉꽉 채우며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니멀리스트로 사는 것이다.
불황이 미니멀리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미니멀리즘은 경기가 침체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한 미학이었다[...]내가 속한 이 세대는 물질적 안정과 건강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 늘 당장 가져다 쓸 자원은 턱없이 부족했고 남는 것을 차지하려는 경쟁은 치열하기 이를 데없었다[...]안정은 이미 기본값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불황’과 ‘미니멀리즘’이란 낯선 두 단어를 나란히 놓은 점이 흥미로웠는데요.

통상 미니멀리즘은 인테리어 잡지 속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처럼만 여겨져왔기 때문이죠. 인테리어 뿐 아니라 미니멀리즘 전도사들은 ‘정리’에 선(禪)이나 청교도적 도덕의 개념까지 부여했습니다. ‘더 많은 물건’은 마음의 흐트러짐을 보여주는 것이고, 탐욕이기 때문에 이를 죄다 버려야한다는 거죠. (Less is better)

하지만 이런 ‘물욕을 꾸짖는 말씀들’에 잔뜩 주눅들기 전에, 한번쯤 조금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애초에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물욕을 가져본 적이 있긴 했는가?’라는, 지점에서요.

서울의 2~3평대 집에서 생활하는 고근형, 조영국씨는 "강제된 미니멀리즘" "선택권이 없으니 취향도 없다"고 말했습니다(왼쪽·기사) EBS <도시예찬>('안녕! 가든테라스'). 대구 가든테라스 아파트(1982년 입주)는 오늘날 수익성만을 극대화하는 아파트와 달리 방문객을 환대하고 주민들이 가꿀 수 있는 정원까지 마련한 독특한 아파트입니다. 이곳엔 정성스레 가꿔온 화분 등 오랜 삶이 묻어난 '잡동사니'가 많습니다. / 경향신문, EBS(링크)

애초에 이 시대에 대부분의 도시 생활자들은 집 공간 뿐 아니라, 내가 가진 물건, 외부 환경, 이웃, 산책로, 주변 가게들과도 각별한 물질적, 정신적 관계(애착)를 맺을 기회가 없습니다.

오늘날 대도시의 아파트, 다세대주택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집을 ‘내가 애정을 쏟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잠깐 잠을 자는 곳, 층간소음 및 이웃과의 갈등, 학군, 갚아야 할 대출금(“진짜 내 집은 ‘현관만큼’이야”) 등의 이미지가 강하죠.

집 안을 제대로 개성있게, 자신만의 색채로 각별하게 꾸미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도 드뭅니다. 구조상 한계가 있기도 하고요.

물질적 세계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물질을 더많이 축적하기 보다는 은둔자나 유목민이 되거나 예술로 승화하는 방식으로 물질을 포기하고 스스로 고립되는 편이 더 매력적인 시대다. 이처럼 압도적이면서도 소외감을 일으키는 끈질긴 감각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란 어렵다. 그것이 아마도 미니멀리즘이 이토록 널리 전파된 이유일 것이다.

저는 이 대목에서 특히 ‘물질을 포기하고 스스로 고립되는 편이 더 매력적인 시대’라는 부분에 많이 공감했습니다. ‘짠테크’ ‘가성비’ 등의 단어는 부지런함, 절약 등의 긍정적인 단어와 연결이 되고요.

아끼는 게 나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 포기, 단념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 지나치게 미덕이라는 단어로 포장을 해온 게 아닌가 싶을 뿐이었습니다.

한편 ‘사치 미니멀리즘’은 조금 다른 층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커다란 공간을 낭비하며 마치 고급 호텔처럼, 삶의 느낌이 없도록 마치 ‘무균실’처럼 꾸며놓는 것이 사치스러운 미니멀리즘 공간의 특징인데요. 이런 곳은 ‘미니멀리즘’이라곤 하지만, 실은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뿐더러, 사람들을 밀어내는 공간입니다.

글라스하우스의 투명함은 드러내는 만큼 감추는 법도 잘 알고 있었다. 미니멀리즘은 억압적일 수 있다. 미니멀리즘 스타일은 당신이 이걸 따르지 않는다면 그 공간에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고급스런 카페나 딱딱한 느낌의 호텔 로비에 머물 때처럼 말이다[...]비어있는 실내는 럭셔리해보인다. 하지만 그건 높은 비용을 들여 까다로운 취향을 반영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단순함은 허울이다.

사치스러운 미니멀리즘이든, 이케아식 미니멀리즘이든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물건은 ‘악’이며, 인간의 삶이라든지 각별한 취향이 깃들 여유가 없다는 점이죠.

최소한의 집기만을 둔 집안에서 잡동사니는 눈에 거슬리는 순간 ‘사라져야’ 하므로, 다이소에서 산 값싼 물건들 - 우리가 정을 줄 필요도 없고 언제든 버리면 되는 - 이 벽장이나 하얀 문갑 속 어딘가에서 버려지기 전까지 조용히 잠자고 있을 뿐입니다.

1)참고로 이 책 속 101가지 물품 중 절반 이상이 식기류, 조미료인데 - 이 실험의 숨은 한가지 '사기 조건'이 하나 더 있다면, 삼시세끼를 모두 다 배달음식 혹은 외식으로 때워도 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기 싫었기 때문"에 직접 식기들을 계속 들여놓습니다. 조리를 '사치'로 바라보는 시선이 흥미로웠습니다.(쌀이나 양배추, 고기, 빵 등은 항목에 포함되지 않지만 두반장, 버터같은 조미료는 갯수가 카운트됩니다)

2)가난은 공간을 많이 필요로 하거나, 혹은 극단적으로 적게 필요로 합니다. 전자는 온갖 잡동사니를 일단 '끌어모아' 둬야 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고. 후자는 집이 좁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모든 집에서의 활동(공부, 여가, 세탁, 요리 등)을 '외주화'하는 것이죠. 전자의 경우 조금 갸우뚱하실 수도 있는데, 미국의 극빈층 삶을 그린 에세이 <핸드투마우스>에서 린다 티라도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과연 그에게 '설레지 않는 건 버리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는 단정하게 보관할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많은 물건을 갖고 있다. 뭔가가 언젠가는 필요할지 모르는데 그때는 살돈이 없을지 누가 아는가. 그래서 미래에 사용할 가능성이 있는 물건은 일단 보관해놓고 버린 적이 거의 없다. 얼룩진 셔츠는 어느 순간에 가구광택제, 걸레로 유용하게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망가진 커피메이커 두대를 분해해서 작동하는 커피메이커 한대를 만든 적도 있었다."-<핸드투마우스>

【3.‘생활명품’ vs 다이소】

“몸에 배서 너무나 당연한 것, 몸의 행복에 따르기 마련인, 드러나지 않고 내재하는 진정한 즐거움이 그들에게 부족했다[...]그들이 사치라 부르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돈을 전제한 것이었다[...]그들이 좋아하는 에피날 지방의 모사본, 영국식 판화, 마노, 유리 섬유, 새롭게 디자인한 원시풍의 자잘한 물건들(은)[...]어느 진열대에서든 발견할 수 있었다.”-조르주 페렉, <사물들>

몇년 전 한창 ‘금수저 플렉스’가 유행이었을 때,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에 뜬 영상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주된 콘텐츠는 백화점 명품관에 가서 멋진 옷이나 가구, 향수, 만년필, 술 등을 구입하는 것이었고, 일반인들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브랜드의 고급품들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나와 다른 세계구나!”라고 생각하며 스크롤을 내리다가 꽤 흥미로운 댓글을 보았습니다.

‘안목을 대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생 저 중에 하나 사볼까 말까겠지만요...’

저는 그 댓글을 읽고 ‘안목을 대신 키워줄 수가 있는건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어서 어쩌면 그 댓글에서의 ‘안목’이란 말의 쓰임새야말로, 우리가 평소 안목을 바라보는 시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고요. 마치 초고급, 비싼 명품에만 붙일 수 있는 거룩한 무언가처럼요. 이 때문에 좀처럼 우리가 스스로의 삶 차원에서 안목을 넓혀볼 다짐은 해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윤광준의 생활명품 101>은 지난 ‘생활명품’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지난 20년 간 이를 대중에게 소개해온 사진작가 윤광준이 선정한 ‘물건’들을 모은 신간입니다. 즉 이 책은 저자 본인이 각별하게 생각하는 101가지 ‘생활명품’이 무엇인지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죠.

왠지 ‘생활명품’하면 ‘명품’이라는 단어 때문에 비싼 고급품들만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주눅이 들 수 있습니다만, 그보다도 생활 명품이란 ‘만든 사람의 고집과 성의가 느껴지는, 소박하고 쓸수록 손에 딱 맞는 물건 - 나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죠.

'생활명품'이라는 개념을 대중에게 소개해온 사진작가 윤광준. (왼쪽) <윤광준의 생활명품 101>에 포함된 생활명품들. 카메라, 돋보기, 촉각 시계, 메모지 보관함, 연필, 헬멧 등이 눈에 띕니다. '값비싼 유명 브랜드'의 제품이 아니라 만듦새가 좋고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 '생활명품'입니다. / 경향신문, 을유

우선 장인이 주는 치밀한 감동이란, 우리가 쉽게 만나기 어려운 부분인데요. 이는 꼭 아주 비싸고 굉장한 명품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저자는 이 책에서 딱 자기 역할만을 잘 하는 여행용 도어스토퍼, 아날로그 계산기, 오래 쥐어도 편안한 가위 등을 예로 드는데요. 이런 물건은 대체로 물건에 집요한 고집을 지닌 장인들이 열성을 다해, 철저히 쓰는 사람 입장에서 만든 것입니다.

이런 물건들은 쓸데없는 화려함과 불필요한 기능을 없애 가장 소박하고 단단하게 만든 물건이죠. 저자에 따르면 “이 정도면 됐겠지”를 넘어 “이 정도는 돼야지”의 차원으로 넘어간 물건입니다.

* 홀더의 위판은 용지가 쉽게 빠지도록 둥굴렸고, 밑판은 용지를 힘주어 당겨도 덜그덕거리지 않도록 묵직하게 만들었다. 사용자의 편리를 헤아린 대처다. 물건이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편리의 감탄까지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좋은 물건이다. 좋은 물건은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배려가 그 출발이다.” (쓰리엠포스트잇홀더)

* 군용품치고 복잡한 것은 없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 조작의 실수를 유도하는 물건은 무용지물이 아니던가. 군더더기 없는 기능의 완결과 견고함, 이것이 군용품의 매력이다[…]안락함과 거리가 먼 몽골 여행에서 수통컵은 위력을 발휘했다. 아침에는 물을 담아 이를 닦았다. 점심시간엔 라면을 끓이는 냄비가 되었다. 작업을 위해 모래를 퍼내야 할 땐 부삽으로 변신했다[...]쓰임새를 찾는 일은 각자의 상상력에 달렸으니 마음껏 발휘해 보시길… (미군 수통컵)

-윤광준, <윤광준의 생활명품 101>(이하 동일)

저는 이런 대목을 읽으며 예전에 레터에서도 다루었던 UX 디자이너 도널드 노먼의 ‘인간 중심 디자인’이 떠올랐습니다.(✉️지난레터: ‘기계의 기능은 많을수록 좋은가?’) 노먼은 ‘쓰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도구’ ‘목적과 맞지 않게 복잡, 화려하기만 한 도구’는 나쁜 도구라고 비판했었는데요. 이런 생활명품들의 특징이 당시 노먼이 주장한 인간 중심의 디자인에 꼭 맞는 사례겠구나 싶었습니다.

이어 101가지 제품들은 반드시 본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저의 눈에 띈 것은 사고 대비용 응급 키트였는데요. 저자는 어느날 아찔한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이후 반드시 잘 만들어진 구조용 키트를 차에 언제나 소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납작한 디자인은 손에 쥐기 쉽고 눈에도 잘 뜨인다[…]사고 이후 내 차의 사이드 포켓에 오딘 세이프티 토치를 비치해두었다[…]귀엽게 보이는 몸체에 필요한 기능을 농축해놓은 디자인이다. 살면서 쓰지 않을수록 좋다. 영영 쓸 일이 없다면 더욱 좋다. 그래도 준비해두어야 한다. 우리는 두 번 살지 못한다.(오딘 세이프티 토치)

이 대목이 흥미로웠던 건, 이 독특한 제품은 저자가 실제 교통사고를 당해본 경험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일반적으로 필요성을 느끼기 힘들었을 물건이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쓰임새가 좋은 물건이지만, 쓰지 않을수록 좋은 물건이라는 점도 있습니다.

세상엔 쓰지 않기 위해 놓아두어야 하는 무언가도 있는 법입니다.

【4.안목은 ‘플렉스’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나만의 안목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연결됩니다.

이처럼 ‘안목’은 내게 다가오는 감동과 실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 이는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 나의 수준과 삶의 궤적에 맞게 스스로 발굴해내야 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저는 사이클을 타지 않고 만년필을 쓰지 않기 때문에 이 책에 소개된 사이클 가방과 만년필용 잉크에 대해 딱히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 억지로 안목을 가질 필요는 없겠죠. 대신 저는 포근한 이불이라든지, 편안한 안경테엔 관심이 있습니다.

또한 ‘자기 수준에 맞는’ 시도도 필요합니다. 만약 제 월급이 500원인데 남들이 좋다고 해서 100원짜리 음식을 즐겨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먹을 순 있겠지만, 가격표가 눈에 띌 때마다 체할 게 분명합니다.

즉, 결국 자기 수준에 맞는, 자신의 필요와 삶에 맞는 것을 다양하게 시도해보고 실패하고 또 궁리해보는 과정을 통해 안목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알기 위해선 하나하나 써보는 수밖에 없다. 이미 알아버린 이들이 먼저 감각의 물건들을 만들어 냈다[…]취향이 행동으로 드러나야 각자의 라이프스타일로 굳어진다. 어떤 경우라도 그 바탕은 오감의 회복과 균형감각의 발동이다. 경험으로 얻게 된 깨달음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절로 구분한다. 지녀야 할 물건과 버려야 할 물건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열개를 버릴수밖에 없는 과정에서 키운 안목의 힘이다.
잘고 사소한 일의 연속으로 채워지는 게 일상이다. 이를 가볍게 여기지 마시라. 자잘한 선택이 모여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한다. 약은 체 하며 남의 경험을 빌려 과정을 단축시킨다 해도 별 소용 없다. 내 것이 빈약하면 선택을 주저하게 된다. 취향은 행동으로만 드러나는 법이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라이프스타일이란 결국 시간과 돈, 노력을 아낌없이 써서 만든 게 맞다.

마지막 문장에서도 이르고 있듯, 역시 물건에 대한 안목을 기르는 데도 어느정도 비용이 들 수 밖에 없는데요. 저자는 이에 대해서는 책에서 꽤 단호하게 여러번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안목이라든지 취향은 결코 ‘거저’ 얻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책, 글에 대한 자연스러운 자기 나름의 취향을 얻기 위해선 일단 나의 눈으로 직접 많이 읽어봐야 하듯, 어떤 물건에 대한 취향도 마찬가지죠. 나만의 안목을 키우기 위해선 반드시 어느정도의 비용과 노력, 시간, 헌신을 투입해야만 합니다.

LP 레코드판을 읽는 데 이용되는 오르토폰 SPU 카트리지. 저자는 물건이 닳는 것이 아까워서 레코드를 덜 듣는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아낌없이 즐겨보는 각오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왼쪽) 저는 '안목'에 대한 이야길 읽으며 '독서'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소 책을 아예 안보던 사람들은 갑자기 '서울대 교수 선정 고전 100선'으로 훅 건너뛰고는 주눅이 들어 책을 덮곤 합니다. 독서의 '안목'을 높이기 위해서도 직접 나의 수준과 관심사에 맞는 책이 어떤 것인지 꾸준히 해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Ortofon, 경향신문

저는 LP를 듣지는 않는 사람이지만, 아래와 같은 대목을 읽을 때는 숙연해졌습니다.

처음엔 비싼 카트리지 바늘이 닳을까 아까워 엄선한 레코드만 들었다. 나이들어서야 깨달았다. 내게 남은 의미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음악을 듣는다는 건 스스로를 일깨우는 의식의 자양분을 얻으려는 게 아닌가. 아무리 열심히 LP를 돌린다 해도 내겐 두 개정도의 SPU를 쓸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SPU의 바늘 값이 아깝다면 그려내는 아름다움의 기대도 접는 게 맞다. 아낌없이 판을 돌려 미처 알지 못한 음악의 세계가 내게 오도록 해야 한다…(오르토폰 SPU 카트리지)

또한, 마지막으로 ‘안목’의 핵심은 결국 내가 어떤 물건과 각별한 관계를 맺겠다는 각오 그리고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때그때 필요한 물건을 사서 쓰고 쉽게 버려버릴 수 있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혹은 대부분의 물건과 관계 맺지 않고도 거뜬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굳이 ‘쓸데없는’ 안목을 키울 필요도, 물건을 귀중히 여길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5.맺음말】

오늘은 ‘미니멀리즘’과 ‘다이소’라는 두 단어를 엮어 해찰을 해보았습니다.

이 두 단어는 얼핏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삶에 있어 ‘물건’의 중요성과 의미를 지운다는 차원에서 닮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쪽은 물건 그 자체를 없앰으로써, 한쪽은 우리가 물건을 아주 싼 값에 무한정 누릴 수 있으며 언제든 치워버릴 수 있다!는 ‘가벼운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 우리는 어찌됐든 살아가기 위해, 물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주 옛날부터 이런저런 물건들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왔습니다. 그런 물건들을 알뜰하게 돌보고, 고장나면 고치고, 정도 주면서요.

어쩌면 ‘물건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는 이야기는 우리가 갖지 못한 즐거움에 대해 쉽게 단념하게 하면서, 우리 삶에서 물건이 갖는 가치를 제대로 궁리해 볼 기회조차 앗아버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또한 우리가 간과해선 안되는 지점도 있습니다. ‘저렴한 값으로 사고 쉽게 버릴 수 있는’ 물건엔 제값이 매겨져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죠.

웬디 A.윌러슨은 18세기 이후 산업화로 인한 ‘대량 생산 싸구려’의 역사를 그린 책 <싸구려의 힘Crap>(링크)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이런 형태의 생산체계를 정당화할 수 없으며 “저렴해 보이는 물건들의 실제 비용을 보다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수세기 간 싸구려의 대량 생산과 폐기를 가능하게 했던 핵심은 제3국의 저렴한 노동력과 환경 오염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래 ‘평균실종 시대’(링크)라는 개념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적당한 값’의 상품은 사라지고, 아주 싼 것 혹은 아주 비싼 것으로 양극화되어간다는 것이죠. ‘짠테크(미니멀리즘)’와 ‘플렉스’로요.

오늘 레터의 내용을 바탕으로, ‘평균실종 시대’라는 말에 대해 곰곰 해찰해봅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평소 일상에서 물건을 소중히 여기고 ‘물건과 함께 살면서’ 나만의 안목을 계발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대신 가끔 남의 안목을 빌려 ‘무리해서 플렉스’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얻고 있는 건 아닐까요?

질문은 이어집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방식의 소비를 통해, 과연 물건과의 건강한 관계 맺기를 할 수 있을까요? 물건과 나의 삶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 있다고 외치는 미니멀리즘이 해답일까요?

저 역시 당장 ‘나무토막’같은 삶에서 벗어나긴 어렵겠지만, 지금부터라도 평소 어떻게 나의 주변 물건들과 관계 맺을지를 조금씩 고민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 결국 저 자신의 삶 뿐 아니라 전체 생태계를 이롭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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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고급품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본질에 충실하고 아름다움이 풍기는 물건들이 당긴다[...]삶은 물건을 쓰면서 이어진다. 자신의 일상이 소중하다면 살기 위한 물건들에 신경쓰는 건 당연하다[...]주거의 형태와 사는 방식이 생활의 내용들을 규정해 나간다. 쌓여가는 물건과 도구로 비롯되는 일상의 깊이가 살아가는 즐거움을 키우게 된다. 제손으로 끌어들인 생활의 풍요가 리추얼로 바뀌는 게 라이프스타일이다. 생활이 곧 그사람의 삶의 내용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윤광준의 생활명품 101>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카일 차이카, 박성혜 옮김, 『단순한 열망:미니멀리즘 탐구』, 필로우, 2023.

-1960년대 미니멀리즘의 예술 사조와 오늘날의 미니멀리즘 트렌드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미니멀리즘의 의미에 대해 궁리해본 책입니다. '줄임, 비움, 침묵, 그늘'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미니멀리즘을 바라보았는데요. 오늘 레터에선 주로 전반부(줄임, 비움)에 주목을 해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노이즈캔슬링, 자극 차단에 대해 다룬 3부(침묵)도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 아이디어와 관련해서는 추후에 레터에서 다룰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통상 우리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미니멀리즘과는 다른 관점의 미니멀리즘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윤광준, 『윤광준의 생활명품 101』, 을유문화사, 2023.

-저는 오늘 레터에도 썼듯이 안목이라곤 대체로 없는 사람인데요. 이 책을 읽고 나서는 평소 나의 삶을 조금 더 각별하게 해줄 수 있는 사물들을 찾아 정을 붙이는 연습을 틈틈이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생활명품에는 어묵이나 간장 등 먹거리에 대한 항목도 있고, 일회용 안경닦이같은 작은 것들도 포함되어있습니다.

이 책의 한 가지 테마는 ‘장인정신'이기도 한데요. 나의 소비가 어떻게 이런 장인들을 북돋고,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 우리가 '소비자'가 아닌 '향유자'로서의 책임을 가질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아래 '글 속 한문장'에도 글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후지오카 미나미, 이소담 옮김, 『사는 데 꼭 필요한 101가지 물건』, 쌤앤파커스, 2022.

-이 책의 부제는 '다 버려봐야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입니다. 오늘 레터는 미니멀리즘 그 자체를 비판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엄밀하게는 변질된 미니멀리즘(생활감을 모두 배제하는 등 오히려 왜곡된 인식을 강화할 수 있는)을 경계해야한다는 입장입니다.

이 책의 반짝이는 부분은, 결국 어떤 방향으로든지 '물건을 새롭게 보는'(관계를 새로 정의해보는) 궁리의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후지오카 미나미가 처음으로 선정한 '물건'은 이불인데, 이는 단순히 덮는 물건으로서만 기능하는 게 아니라 그의 '빈 섬' 안에서 '좌식 생활을 가능하게 해준' 대단한 발명품입니다.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아이 셋 생기니 정리가 불가능해졌다”

독서시간: 약 2분 / 글자수: 약 1000자

🖍글 속 한 문장

"이전까지 나는 정리 전문가였다. 항상 집안 정리를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포기했다. 이제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정리된 집보다 (어지럽혀져 있어도) 집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정리의 신이자, 미니멀리즘 구루 곤도 마리에가 올해 초 CNN 인터뷰에서 "아이가 셋 생기니 나도 정리가 불가능해졌다"라는 말을 해서 사람들이 깜짝 놀랐었죠.

이 소식을 읽으면서 한편 집 정리(물건 관리)에는 당연히 '노동'의 측면도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떤 물건을 버릴지, 둘지, 어떻게 수선할지를 고민하는 것 까지 포함해서요. 이어서 어쩌면 물건과 함께 살기보다는, 여차하면 쓰고 버리는 습관이 일상화된 것은 가게에서 일상적으로 일회용품을 많이 쓰는 이유와 똑같은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버릴지 말지조차 고민 없이 그냥 버리기 위해서요.

오늘날, 물건은 수리되지 않는다

지난 레터(‘아이폰을 고쳐 쓸 수 있을까’)

🖍글 속 한 문장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간 내 몸을 돌보고 화분을 돌보았지만, 세탁기를 돌보고 밥통과 에어컨을 돌보는 일(?)엔 너무도 무심했던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요. 기계를 돌본다 말이 좀 묘하단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지구를 오래 쓰는 일을 궁리하면서 우리 주변에서 가장 친숙하게 많이 쓰는 것들에 대해선 오래 쓰는 일과 책임을 궁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요?”

👤김스피의 블라블라

과거 ‘수리권(right to repair)'에 대해 다루었던 레터입니다. 당시엔 물건의 소비라든지 소유의 측면보다는 '수리'라는 단어 그 자체에 집중을 했었는데, 오늘 레터를 쓰면서 계속 수리권에 대한 회차가 떠올랐습니다.

예전에 저는 저렴한 옷을 입다가 지퍼가 고장이 났을 때, '지퍼 수리하느니 새 옷 사는 게 더 낫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어쩌면 계속 싸지는 물건(한편 수리는 어려워지는)들은 우리가 수리해서 애정을 가지고 그 물건을 쓰기보다는 금세 버리고 소비해버리는 것에 익숙해지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폐기물로 인한 환경적 비용은 대체로 제3국에 전가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섬네일의 사진은 <리페어 컬처>를 쓴 볼프강 헤클의 ‘수리 작업실’ 사진인데요. 미니멀리스트는 (별 가치도 없는 '물건'에 집착하면서, 그것을 수리하기 위해) 이런 '온갖 불필요한 잡동사니 볼트, 너트, 장비 등'을 쟁여놓은 작업실에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성비 만능주의: ‘소비자’와 ‘향유자’

독서시간: 약 6분 / 글자수: 약 3600자

🖍글 속 한 문장

“현재로서는 ‘향유자’의 각성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책에 등장하는 ‘향유자’는 ‘소비자’의 다른 표현입니다...소비력, 즉 돈 외에도 생산자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평론가로서 부지런히 또 끊임없이 알리고 싶습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한식의 품격> 등을 쓴 음식평론가 이용재가 지난 2018년 <미식대담>을 쓴 후 진행한 인터뷰입니다. 오늘은 주로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실은 '가성비 제일주의'가 가장 극심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먹거리나 외식 분야가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비록 물건은 덜 살 수 있어도 밥을 덜 먹을 순 없으니까요.

물가가 크게 오르면서 가장 먼저 식비를 줄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만, 먹거리가 결코 하늘에서 절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누군가의 노동과 희생, 헌신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산자와 내가 동떨어져있지만은 않다는 감각, 장인을 지지하는 마음을 이용재 평론가는 '향유자'로서의 정체성이라고 말합니다.

사물의 기쁨

독서시간: 약 4분 / 글자수: 약 1600자

🖍글 속 한 문장

“책도 문구도 내비게이션도 가구도 사실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연쇄에 갇힘으로써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사물의 풍요는 오히려 그 사물의 존재를 잊게 하고, 그 사물이 가져다줄 수 있는 의미를 소멸시킨다.

도구들이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더 이상 그 작동원리를 알지 못하고 도구에 우리 경험을 수동적으로 내맡길 뿐이다. 그나마 책과 문구가 인간의 경험을 보존하는 까닭은 더 복잡해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의 칼럼입니다. 점점 사람들은 네비게이션에 길 찾기를 맡기고, 목수들은 더이상 나무의 결을 직접 손으로 만져 따져볼 이유가 사라집니다. 책은 ‘정보’가 되고, 문구와 우리는 멀어져 갑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어떤 사물을 손에 쥔다는 것, 그리고 그 사물에 애틋한 마음을 갖고 돌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 회차의 반응

지난 회차(‘폰카 없이 살 수 있을까? : 사진 없는 사진첩, 응시’)에 대한 연구자님들의 반응을 모아 소개합니다. 편지로 다양한 의견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 버튼을 누르면 연구자님들의 반응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지난 회차의 반응 및 피드백

1.오는 17일(금)엔 고지했던 강연(‘해찰하는 읽기 : 읽기를 넘어서 나만의 관점 만들기’)이 진행됩니다. 강연을 신청해주신 연구자님들은 그때 뵙겠습니다. 다음 회차 인스피아는 강연 내용 중 일부를 담은 ‘특별호’가 발송될 예정입니다.🌱

단지 인스피아를 기획하게 된 계기, 쓰는 과정에 대한 내용에 대한 실무적인 이야기를 넘어 - 읽고 쓰기 생태계와 방법에 대한 고민을 나누어보려 합니다.

1. 오늘 레터는 어떠셨나요? 아래 ‘💌편지보내기’ 버튼을 눌러서 오늘 레터에 대한 감상이나 질문 등을 보내주세요. 간단한 한줄 감상도 좋고, 연구자님이 떠올리신 독특한 해찰거리도 좋습니다 :) 레터를 통해서 보내주시는 작은 격려와 의견들이 레터를 쓰는 데 큰 힘이 됩니다. 흥미로운 해찰은 레터를 통해 함께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스피아에서 차후 다뤄볼만한 주제나 좋은 콘텐츠 등의 추천도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1.혹시 지난 회차 가운데서 '아, 이 회차에서 이 책(혹은 영화 등)을 다뤘었으면 좋았을텐데, 아깝다!'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지난 회차의 주제에 대한 책이라도 추천해주시면 검토 후 레터에서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신간도 구간도 상관 없습니다. 회차명과 책 이름, 그리고 짤막한 추천 이유를 적어서 아래 '💌편지 보내기' 버튼을 통해 보내주세요. 지난 회차의 레터 내용은 아카이브 페이지(💬링크)를 참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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