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기쁨

2017.07.23 21:02 입력 2017.07.23 21:03 수정

요즘 사람들은 서점에 책보다 문구를 사러 가는 것 같다. 서점마다 문구코너가 빼놓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책이 하도 안 팔리니 그렇게 해서라도 매출을 유지하려는 서점의 고민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출판인들은 책이 놓일 공간을 이른바 ‘굿즈’가 자꾸만 파고드는 모습에 마음이 착잡하다. 이제 책은 영화나 게임뿐만 아니라 문구와도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산책자]사물의 기쁨

이렇게 말하는 나도 사실은 서점에 갈 때마다 문구코너에 꼭 들른다는 고백을 해야겠다. 실제로 뭔가를 사는 일은 드물지만 각양각색의 펜, 노트, 액세서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요즘의 문구들은 디자인, 소재, 기능도 어찌 그리 빼어난지 유혹에 버티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내 파우치 필통에는 어느새 만년필 세 자루, 샤프펜슬과 색연필과 볼펜 각 한 자루, USB 메모리 하나가 들어있게 되었다. 가방 안의 가죽노트와 수첩은 별도로 하고 말이다. 변명을 하자면 이 물건들은 다 제각각 용도가 있다. 작심하고 글 쓰는 만년필과 책에 줄 긋는 만년필, 컬러잉크가 든 만년필 식으로.

생각해보면 책과 문구는 오랜 친구였다. 이 아이들은 손에 촉감을 주고, 어루만지고 긋고 접을 수 있는 기쁨을 준다. 책갈피를 한 장씩 넘기고 여백에 뭔가를 적거나 노트에 옮기면서 우리는 생각의 공간을 창조한다. 책을 펴고 만년필을 꺼내어 뽀얀 크림지에 사각사각 글자를 적어 내려가면 마치 내가 헤밍웨이라도 된 듯하다. 그러니 지난주 ‘산책자’에서 책을 삼켜버리는 굿즈의 역효과를 우려한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께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말하고 싶다. 오히려 이 아이들이 앞으로도 내내 친밀한 관계를 잃지 않기만 바랄 뿐.

나는 이런 낡은 경험들이 다음 세대에서 차츰 잊혀지는 게 더 두렵다. 손수 한 글자 한 글자를 종이에 적고, 그 과정에서 느리지만 긴 생각의 실타래를 만들며 스스로를 키우는 경험 말이다. 쉽게 쓰는 만큼 쉽게 고칠 수 있고, 눈앞을 쉽게 스쳐 가는 모니터와 영상 위의 디지털 신호들은 어쩐지 신기루 같다.

출판에서도 지난 30년은 숨 가쁜 변화의 시간이었다. 눈부신 손놀림으로 활자들을 골라 판을 짜던 식자공들은 일시에 사라지고, 한동안은 CTS라고 하여 컴퓨터 식자를 사진으로 인화해 판을 짜던 방식이 유행이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아예 조판디자인 프로그램으로 인쇄 직전의 판을 짜서 바로 책을 찍는 CTP 방식이 대세가 되었다. 젊은 편집자들은 납 활자 하나가 옆으로 누운 바람에 북새통을 피우며 판을 고치고, 스프레이 풀을 뿌려놓은 사진식자가 어디에 붙었는지 찾을 수가 없어 새로 인화를 뜨곤 하던 옛 편집부의 풍경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당시 편집자들은 글자 하나, 문장 한 줄이 가진 무게감을 천근같이 여길 수밖에 없었다. 조사나 구두점이 있고 없는 차이로 필자의 의도를 깊이 간파하곤 했다. 의미의 상실은 쉽게 넣고 쉽게 지우는 기술로부터 올 수도 있다.

깊고 세심했던 인간 경험이 점점 빈곤해지는 것은 출판뿐 아니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내비게이션 때문에 우리는 길의 생김새나 모퉁이의 작은 가게를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수십 번 다닌 길을 여전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길에 서린 이야기와 냄새와 노을빛을 알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점점 길치가 되면서 감각의 치매도 함께 겪게 되었다. 대패와 끌을 가지고 문짝을 짜던 목수는 어떤 나무가 문짝에 알맞은지, 옹이는 어떻게 처리하고 결은 어떻게 살려야 하며, 나아가 그런 나무는 어떤 지방에서 자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공장에서 나오는 갖가지 모양의 판재를 가져다가 조립하기만 하면 책상 하나를 뚝딱 완성할 수 있는 요즘에는 거의 사라져버린 경험이다.

책도 문구도 내비게이션도 가구도 사실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연쇄에 갇힘으로써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사물의 풍요는 오히려 그 사물의 존재를 잊게 하고, 그 사물이 가져다줄 수 있는 의미를 소멸시킨다. 도구들이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더 이상 그 작동원리를 알지 못하고 도구에 우리 경험을 수동적으로 내맡길 뿐이다. 그나마 책과 문구가 인간의 경험을 보존하는 까닭은 더 복잡해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년필로 글자를 쓰는 데 펜촉과 잉크배럴과 뚜껑 말고 더 필요한 부속이 무엇이 있을까.

사물은 단순하고 적을수록 우리 삶의 의미를 풍요롭게 만든다. 내가 만지고 통제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물은 그 사물을 씀으로써 나 자신을 배가시키는 기쁨을 안겨다 준다.

그게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이 사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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