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물가 풍경

2012.10.19 20:48 입력 2012.10.20 04:17 수정
박영택 | 경기대 교수·미술평론

고려인들은 차와 술을 중요한 음식으로 인식했고 이를 즐겼다. 차 문화의 확산에 따라 청자로 만들어진 다기가 발달됐고 주기 역시 요구돼 주자가 발달했다. 차란 선종의 유행에 따라 참선에 요긴한 수단이었으니 당연히 다기의 표면에는 선계의 모습이 어른거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학과 구름이 자욱한 풍경이 삽입되었으리라. 술을 담는 술병(주자) 역시 술에 취해 표표히 세상을 떠돌고 싶다는 마음을 투영하기에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와 수면 위를 떠다니는 오리의 모습이 호출되었을 것 같다.

고려시대에는 연못을 만들어 버드나무를 심고 오리를 키우며 이를 감상하는 취미가 널리 유행했다고 한다. 특히 문인들은 호젓한 정자에 친구를 초대해 술과 차를 곁들여 거문고를 타고 바둑과 시 짓기로 여가를 즐겼다고 한다.그릇의 표면에 그려진 그 풍경은 고려시대 사람들이 꿈꿨던 이상향에 다름 아니다. 청자의 색채 역시 유토피아. 피안을 보여주는 색이다. 모든 시대의 미술에는 당대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삶과 행복의 도상들이 투사되기 마련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천하제일 비색청자’(10·16~12·16)전에서 만난 이 술병 앞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박영택의 전시장 가는 길]한가한 물가 풍경

그릇의 표면에는 물가 풍경이 소박하게 그려져 있다. 당시 고려인들은 물가 풍경을 앞에 두고 술을 마시며 한가롭게 소일하는 것이 큰 행복이었던 것 같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이파리와 우아한 몸놀림으로 물살을 가르는 오리의 몸에서 더없는 아름다움과 지극한 평화로움을 보던 눈이고 마음이다. 여유롭고 운치 있는 인생관이 감촉된다. 당시 문사인 이규보는 “여름에 손님과 함께 동산에 자리를 깔고 누워서 자기도 하고 앉아서 술을 마시기도 하며, 바둑도 두고 거문고도 타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다가 날이 저물면 끝낸다. 이것이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다”라고 노래했다.

물가 풍경과 비색이 어우러진 주자의 표면은 고려인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를 환각처럼 안겨주고 있다. 나 역시 저런 풍경을 앞에 두고 한가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면서 술에 취하고 싶다. 번잡하고 속악한 현실에서 풀려나 자연에 마냥 투항하며 모든 욕망에 의해 들썩거리던 몸을 죄다 소진시켜버리고 싶은 것이다. 청자에 그려진 물가 풍경이야말로 한국인들이 염원하는 유토피아, 참된 삶의 원형을 안겨준다. 그래서 먼훗날 소월 또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고 간절히 노래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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