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멘붕 탈출법

2012.12.25 21:15 입력 2012.12.25 21:16 수정
하승수 | 변호사

대선 결과를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들은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찬바람을 맞으며 거리와 농성장에 있던 분들입니다. 우선 신고리 원전에서 출발하는 초고압 송전탑으로 인해 몇 년째 고통을 받고 있는 밀양과 청도의 어르신들이 생각났습니다. 마을과 땅, 삶을 지키기 위해 겨울에 산을 오르내리며 공사를 막고, 칠십 평생에 처음으로 집회와 농성이라는 것을 해야 했던 어르신들이 생각났습니다. 지금 심정이 어떠실지 생각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도 생각났습니다. 마을 주민의 10분의 1도 안되는 사람들이 은밀하게 모여 유치 신청을 한 이후, 5년8개월 동안 해군기지 반대운동에 매달려왔던 분들입니다. 주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정부는 일방적으로 공사를 강행했습니다. 그 때문에 생업도 포기하고 반대운동에 매달려 왔습니다. 벌금폭탄에 연행과 구속으로 평화롭던 삶이 파탄났습니다. 이 분들의 심정은 또 어떨지….

[경향논단]대선 멘붕 탈출법

그리고 계속 생각이 났습니다. 무분별하게 허가된 골프장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강원도의 주민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바라면서 험난한 세월을 견뎌온 용산 참사 유가족 분들. 겨울의 칼바람 속에서 위험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아는 이 분들은 투사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소박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금의 상황이 조금이라도 개선되기를 바랬지만, 대선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그리고 세대별로 갈라진 투표성향, 서울과 호남을 제외하고는 빨간 색으로 물든 지역별 투표성향은 오늘의 대선결과가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멘붕에 빠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멘붕에 빠졌습니다. 현장에서 싸워온 사람들 중에는 연락이 안 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 이해가 됐습니다. 얼마나 절망감이 깊었으면 그랬을까? 이해가 됐습니다. 20대 유권자들을 만나니, 그 분들의 상심도 컸습니다. 투표를 통해 뭔가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했지만, 좌절을 한 마음의 상처들이 깊었습니다. 투표권이 없어서 투표조차 못한 청소년들은 ‘본인들에게 투표권만 있었다면 대선결과가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이번 대선은 이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실망과 좌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삶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멘붕에 빠졌던 사람들은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습니다. 강정마을 주민들은 해군기지 예산을 국회에서 삭감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밀양의 어르신들은 대선결과에 관계없이 초고압 송전탑을 막고 마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계속하겠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일들도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 한진중공업, 현대중공업에서 들려오는 노동자들의 자살 소식은 마음을 무너지게 합니다.

저의 멘붕도 아직 다 치유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현장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마음을 다잡게 합니다. 가장 어려운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일 것입니다. 연대속에서 사람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확인하는 것이 멘붕에서 벗어나는 출발일 것입니다. 그리고 치유의 2단계는 ‘참여’입니다. 이제는 기존의 정당이나 정치인이 잘 하기를 기대하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대선은 정권교체가 되려고 해도, 정치판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지역구도와 세대간 구도를 깰 수 있는 새로운 정치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가치와 비전, 정책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금의 정치구도는 깨질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유권자들의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유권자들이 새로운 정치세력을 키워야 합니다. 자신의 가치에 맞는 정당에 가입을 하는 것은 더 이상 어색한 일이 아니라, 유권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선택입니다. 또한 지역구도를 깨기 위해서는 지역의 토호기득권 정치부터 바꿔나가야 합니다. 우리 지역의 토건사업, 우리 지역의 세금낭비와 부패부터 없애야 합니다. 지역에서부터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정착시켜야 합니다. 우리 지역의 에너지, 먹거리, 양극화 문제부터 대안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아마도 2014년 지방선거가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저는 멘붕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보다는 제대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대하고 참여하는 과정에서 나도 치유가 되고, 서로가 치유가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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