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안중근, 그리고 백선엽

2013.08.15 21:52
배병삼 |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사주 명리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사람의 태어난 날짜와 시간을 바탕으로 미래의 길흉화복을 따지는 것이다. 이른바 ‘철학관’에서 행하는 가장 실용적인 ‘동양 인문학’이라고 할까?

명리학에서 이완용의 인생은 어떻게 평가될까? 그보다 더 길하고 복을 누린 사람이 없지 않을까 싶다. 일단 천수를 누렸다(68세에 편히 죽었다). 몇 차례 ‘테러’를 극복하는 천운도 따랐다. 한일합방 은사금 등으로 수천마지기 땅을 소유하는 재복도 누렸다. 일제로부터 최고의 작록을 받았으니 영예가 그럴 수 없고, 몰락한 조선 왕실로부터도 내내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으니 그것도 짭짤한 명예다.

[공리공담]이완용, 안중근, 그리고 백선엽

그의 장례식에는 일본 왕실의 대표와 조선 왕가 후예 등 동양 3국의 내로라하는 귀족과 명사들이 몰려왔다. 서울 자하문 근방 자택에서 서울역까지(장지가 익산이라 기차로 영구를 옮겼다) 만장 행렬이 10리길을 덮었다. 한 인간의 평생이 그처럼 길과 복으로 가득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장례식 장면은 ‘대한 늬우스’ 필름처럼 촬영되어 오늘까지 전한다니 덧붙일 말이 없다.

그 반대편에는 안중근이 있다. 명리학적으로 그보다 더 흉하고 불운한 팔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제 명에 죽지 못했다. 31세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갔다. 가족이 절멸하다시피 했고, 훗날 동생은 죽은 형을 대신하여 일본에 사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죽는 순간까지 담담히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이토 히로부미라는 자를 죽인 것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어지럽히면서도 간교한 말로 분식하는 일본의 처사를 처단하는 공의로운 행위였음을 천명했다. 그리고 몹시 춥던 겨울날, 중국땅 뤼순 감옥에서 죽었다.

둘 사이에 공통점도 있다. 오늘날 묘가 없다는 사실이다. 안중근의 묘로 추정되던 곳은 아파트촌으로 바뀌어버렸다. 의거 100주년을 앞둔 해, 그러니까 2005년쯤부터 그의 흔적을 찾으려고 남한,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땅을 뒤졌다. 가묘라도 쓰기 위함이었다. 이완용의 묘는 오가는 사람들마다 침을 뱉고 발로 밟아, 훼손되는 꼴을 보다 못한 손자가 몰래 이장을 해갔기 때문이다.

기묘한 일이다. 평생 복록을 누린 자의 묘는 100년을 버티지 못하고 제 혈육의 손으로 파헤쳐지고, 죽어서 흩어져버린 한 사내의 흔적은 동양 3국이 함께 애를 써서 찾으려 했다니. 생전의 복록으로는 이완용보다 더 길한 사람이 없겠지만, 우리는 그를 매국노, ‘나라를 팔아먹은 비천한 자’로 기억한다. 안중근보다 더 흉하고 악한 운수는 없겠지만, 그를 의사(義士), ‘의로운 선비’로 기린다.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더니 이게 그 말이다. 명리학의 길흉화복은 생전의 삶만 두고 따져서는 안될 줄을 이제야 알겠다.

안중근이 남긴 이름인 의사, 두 글자를 따져 읽어본다. ‘義’는 ‘용사는 제 목이 땅 위에 떨어지기를 각오하며 살고, 선비는 굶주려 죽을 각오로 산다’라던 그 길이다. 제 한 몸의 이익을 놓고 계산하는 삶이 아니라, 사람다움의 가치를 향해 목숨을 던지는 삶이 의다.

‘士’는 설명이 필요한 글자다. 이것은 일본에서는 사무라이라고 읽는다. 무사라는 뜻이다. 반면 조선에서는 사로 읽는다. 선비라는 뜻이다. 의, 불의를 헤아려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같은 ‘士’이되 사무라이에게는 사안의 가치를 판단할 권한이 없다. 주군의 명을 능률적으로 잘 처리하는 것만이 사무라이의 덕목이다. 의, 불의를 판단하지 못하고, 오직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도구일 따름이다. 조선 선비의 ‘의리’가 전면적이고 도덕적이라면, 사무라이의 의리는 기술적이고 도구적이다. 안중근의 ‘의거’는 고종임금의 밀명을 받아 수행한 것이 아니다. 죽는 순간까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면서, 자기 행동의 가치를 기록하고 천명한 데서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안중근은 의사가 맞고, 또 조선 선비의 원형이다.

안중근과 함께 대한민국 육군이 높이는 또 한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백선엽이다. 이이는 만주토벌대, 즉 조선독립군을 ‘비적’이라며 토벌한 일제의 개였다. 그도 ‘사’이긴 하지만, 다만 일본식 사무라이에 불과하다. 제가 하는 일의 가치를 따지지 않고, 상부의 명령을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데 매진한 기술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 조선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도구적 기술자들이 매양 그러하듯, 6·25동란 때 또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최연소 참모총장’이 되었다.

근래 이 사람을 영웅으로 칭하는 자들이 생겼다. 내 생각으로 백선엽의 이름은 ‘달인’ 정도가 합당해 보인다. 기술적으로 한 분야에 뛰어난 자를 달인이라고 부르니까 말이다. <장자>에 나오는 포정이 소백정의 달인이듯, 백선엽은 전투의 달인인 것이다. 하긴 일본식으로 치자면 영웅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만, 그러나 조선식으로는 결단코 영웅일 수가 없고 고작 ‘살인의 추억’일 뿐이다. 어제가 광복절, ‘빛을 되찾은 날’이기에 이름을 둘러싼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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