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재주꾼들의 세상

2013.12.06 20:31
배병삼 |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어려서부터 차근차근 제대로 배운 한문 공부가 아닌 터다. 성년에 이른 뒤 시작한 늦공부였다. 좋은 스승을 만나 글 읽는 법을 배운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스승은 돌아가시고 나이는 들어가는데 뜻 모를 문장을 만나면 어디 물어볼 데가 마땅치 않아 속을 끓인다.

[공리공담]어리석은 재주꾼들의 세상

선현들은 석 삼자를 써서 경책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공자가 ‘좋은 벗이 세 가지다’라며 거론한 익자삼우(益者三友) 또 맹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 그리고 퇴계 이황이 조광조의 요절을 초래한 불행을 세 가지로 요약한 것들이 그렇다. 주자의 스승인 정이에게도 사람이 겪는 불행을 세 가지로 축약한 글이 있다.

첫째는 ‘소년등과’라, 젊은 나이에 출세하는 것이다. 오만함 때문에 남은 인생을 망칠 수 있다는 뜻이리라. 둘째는 세도가에 태어나 부모덕에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제 실력으로 얻은 지위가 아니니 처음부터 불행의 씨앗을 잉태한 셈이기에 그렇겠다. 셋째는 재능이 뛰어나 문장을 잘 짓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좋은 재능을 타고나서 말글을 잘하는 것은 행운이지 어찌 불행일 수 있을까 싶어서다. 그 뒤로 내내 재(才)라는 글자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았다.

<장자>를 읽는 중에 이 글자를 만났다. ‘당랑거철’이라는 우화에서다. 한낱 재주만 믿고 세상의 흐름에 맞서는 어리석음을, 수레바퀴에 깔려죽을지 모르고 덤비는 사마귀에 비유한 것이다. 자기 ‘재주의 아름다움’(才之美)을 과신하고 세태 변화에 거스르면 죽음을 초래한다는 경고다. 전국시대라는 대홍수 속에서도 의와 불의를 따지고, 세상사 시비를 가리려 드는 유자들을 비아냥대는 말이기도 하다.

이 글의 속내를 헤아리면서 ‘재능이란 말을 옛사람들이 좋은 뜻만으로 쓰지는 않았구나’라는 배움을 얻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 세상사에서 물러나 제 한 몸 건사하기를 권한 장자니까 재능을 낮춰볼 수 있겠거니 여기고 말았다.

<논어>를 읽다가 또 이 글자를 만났다. “아름다운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더 볼 게 없다”라는 대목에서다. 그야말로 ‘공자님 말씀’으로 여겨버릴 대목이지만, 막상 재능이라는 글자를 주의해보던 터라 그냥 보아 넘겨지지 않았다.

공자에게 참된 공부란 지식 위주의 공부가 아니라, 교만과 인색함을 교정하는 태도 변화를 뜻하였다는 배움을 얻는다. 그러자 수신(修身)이란 글자도 예사롭지 않게 와 닿았다. 말 그대로 ‘몸을 닦는다’는 뜻이니 머리를 굴리는 지식 공부가 아니라 행실을 바로잡는 것이 참 공부라는 뜻이 된다.

그러다가 <맹자>를 읽는데 무릎을 쳤다. 재능이란 말의 쓰임새가 선명하게 와 닿았다. 분성괄이라는 젊은 재사의 죽음을 예견한 대목에서였다. 그가 곧 죽임을 당하자, 제자들이 놀라며 물었다. 맹자의 답변이다. “그 사람이 ‘작은 재주’(小有才)는 있더라만 군자의 도를 배우지 못했더라. 그러니 제 자신을 죽임으로 몰아 갈 수밖에.”

이에 대한 주자의 주석이 정곡을 찌른다. “재주를 믿고 함부로 말글을 짓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까닭이다.” 이제야 바로 알겠다. ‘재능이 뛰어나 문장을 잘하는 것이 불행’인 이유를. 재능은 좋은 것이다. 하늘로부터 재주를 타고난 것은 행운이다. 그러나 인격의 뒷받침이 없는 재능, 덕의 바탕을 갖추지 못한 재주는 불행의 씨앗이다.

이게 옛말만은 아니지 싶은 요즘이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일부 사제들은 이제 사제복 뒤에 숨지 말고 자신의 종북 성향을 분명히 국민들 앞에 드러내라”던 여당 대변인의 말은 말문을 막히게 한다. 개신교, 불교는 물론 원불교, 천도교까지 책임을 추궁하는 ‘종북들’의 파도 앞에서 저 재주꾼은 또 어떤 궤변으로 하늘을 가릴까.

검찰총장조차 제 편이 아니면 ‘찍어내고’, 명백한 사실이 드러나면 개인의 일탈이라고 ‘꼬리를 자르는’ 청와대 재주꾼의 혀끝이 닿는 곳은 어디일까. 또 희생양처럼 잘려나간 ‘꼬리’의 억하심정은 어디다 하소연할 수 있을까.

좋은 대학 나오기 쉽지 않고, 국회의원도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재주와 재능이 출중해야 얻을 수 있는 자리요, 역할이다. 그런데 말글은 얼굴만 있지 않고 뒤통수도 있다. 어리석은 재주꾼들은 제 하는 말의 겉면만 믿기를 바라겠지만, 사람들은 그 뒷면도 읽는다. 막힘없는 말재주로 “사람들 입은 막을 수 있을지라도, 사람들 마음을 납득시킬 수는 없다”고 콕 찍어 밝힌 이는 장자였다.

문제는 말글의 부정적 효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분성괄이라는 젊은 재주꾼의 죽음이 상징하는 바는 크다. 장자든 맹자든 옛사람들이 두루 재능이 제 목숨을 앗아갈 수 있음에 방점을 찍었다는 사실은 날카로운 입들이 횡행하는 오늘 세태에 엄중한 교훈이 된다. 덧붙여 지식을 눈으로 익히고, 정보를 머리에 담는 식의 공부는 자칫 제 목숨을 빼앗는 지름길일 수 있다는 사실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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