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기를 돌리다가

2014.02.14 21:34
배병삼 |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청소기를 돌리는데 숨 가쁜 소리가 난다. 뚜껑을 열어보니 먼지봉투가 꽉 찼다. 새 봉투로 갈아 끼우고 ‘강’을 눌렀다. 굉음을 내면서 몸을 부르르 떤다. 바닥에 갖다 대니 주둥이가 딱 들러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흡입력이 너무 센 탓이다. 한 단계 낮춰 ‘중’을 눌렀다. 숨을 쉬긴 하는데 움직임이 뻑뻑하다. ‘약’을 눌렀다. 그제야 잘 움직이면서 제대로 먼지를 빨아들인다.

[공리공담]청소기를 돌리다가

청소를 자주 하지 않으니까 청소기를 켤 때마다 강을 누르는 게 습관이 되었다. 하는 김에 말끔히 하고 싶어서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이, 사람의 심리는 다 같을 텐데 중과 약 버튼은 누가 쓰나 싶었다. 버튼 두 개는 몸으로 치면 맹장 같은 것이다 싶어 쓴웃음을 짓곤 했다. ‘최강의 역설’을 보고서야 중과 약이 쓰임새가 있음을 알았다.

와중에 몇 가지를 배운다. 강한 힘은 상대방과 들러붙는, 즉 동화(同化)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또 상대와 들러붙어선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것, 그러니까 상대방과 거리를 둘 때 도리어 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힘 그 자체보다 조절이 중요하다는 것 등을 배운다.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인터넷 댓글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의 답변이었다.

“댓글을 읽은 적은 없다. 작가와 독자는 격리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뒤엉켜서 끌어안고 떠들어대는 것은 소통이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 떨어진 거리가 필요하다. 들러붙어서는 소통되지 않는다.”

그렇다. 청소든 사람 간의 소통이든, 제대로 하기 위해선 거리두기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거리두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자기 동조자로 만들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권력은 동화를 행하는 가장 큰 힘이다. 권력욕이 성욕보다 강하다는 말처럼, 상대방을 내 방식에 동화시키려는 것은 동물적 본능일지 모른다.

이제야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가슴에 닿는다. ‘화목하되 똑같으면 안된다’는 것. 들러붙어서, 동일하게 만드는 것은 일치일지는 몰라도 화목은 아니라는 것. 곧 너와 내가 서로 다르다(이질성)는 인식과 거리두기가 화목의 전제조건이 된다. 그런 다음, 이질적인 것들을 잘 조절할 때 겨우 화목에 닿는 것이다. 힘으로 이루는 동화가 오히려 쉽지, 화목이란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겠다.

옛날 이발소에 걸려 있던 액자의 글, ‘가화만사성’은 의미심장하다. 가화(家和)란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면서, 또 함께 조화를 이루는 일종의 경지인 것이다. 공지영 작가의, “가족은 사랑하는 타인”이란 말이 가화의 조건을 제대로 짚었다. 핏줄이라는 동화력을 거리두기(이성의 힘!)로 버틸 때라야 가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아, 힘들지만 중차대한 것이 거리두기다. 어쩌면 진짜 공부는 사랑하는 상대방을, 거리를 두고 지켜볼 줄 아는 힘을 기르는 일인지 모른다.

요즘 창의력이란 말이 나돈다. 창의는 강한 힘이 횡행하는 동질의 세계에선 피어날 수가 없다. 이질적인 것들이 제 목소리를 내는 다양성이 창의력의 밭이다. 독창이 아닌, 오케스트라의 협연에서 형성되는 아슬아슬한 화음(和音)이 창의의 속성이다. 그렇다면 조화를 위한 거리두기 공부가 창의 교육의 한 요소가 된다.

사람이 사이를 가질 때 인-간(人間)이 되듯, 또 인터(사이)가 인터넷의 조건이듯, 기업 역시 타자와 사이를 두고, 또 거리를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 기업이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공무원과 정치가를 매수하고, 대학조차 기업화하는 데 힘을 쏟으면, 상대를 동화시킬 수 있을지언정, 창의는 불가능하다.

더 큰 문제는 동화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법으로 일통한 진나라가 15년을 버티지 못한 것이나 “종일 쏟아지는 소나기는 없다”던 노자의 말은, 강한 동화력의 취약함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조절이 관건이다. 청소기의 ‘강’이 제 힘을 조절하지 못하면 바닥과 한데 붙어버린다. 들러붙으면 시끄럽기만 할 뿐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다. 강한 힘일수록, 중과 약 버튼이 같이 붙어 있는 까닭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최강의 기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약한 것들이 함께 사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이 최강자의 생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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