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슬아치’라는 말을 누가 조장하는가?

2014.03.16 20:56
강신주 | 철학자

‘보슬아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여성의 성기를 나타내는 단어와 벼슬아치라는 단어가 합성된 말이다. 이 말은 주로 여성이란 이유로 온갖 권력과 혜택을 누리는 일부 여성들을 폄하할 때 사용된다. 무서운 것은 이 말이 정당한 노력으로 그에 걸맞은 대가를 얻은 여성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여성의 입장에서 보슬아치라는 말만큼 치욕스러운 말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서 무언가를 성취해도 남성들이 보슬아치라고 폄하한다면, 어느 여성인들 좌절하지 않겠는가.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보슬아치’라는 말을 누가 조장하는가?

능력이 있는 재일교포가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폄하되고, 선량한 유대인이 나치에 의해 악마로 폄하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물론 사회 구성원들을 예외없이 약육강식의 검투사로 만들어버린 체제가 보슬아치라는 용어를 만든 가장 강력한 원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고질적인 남성우월주의와 아울러 자기 정당화의 심리가 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일단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남성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남성우월주의가 전제된다. 문제는 일부 여성들이 남성우월주의를 조롱이라도 하듯이 남성들을 압도하는 현실에 있다. 남성을 결코 이길 수 없다고 믿어지는 여성이 남성을 보란 듯이 이긴다면, 그 여성은 무엇인가 다른 편법을 썼으리라는 남성의 자기 정당화의 메커니즘이 개입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이처럼 보슬아치라는 단어에는 좌절된 남성우월주의자의 서글픈 자기 정당화 심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던 셈이다.

더 큰 문제는 보슬아치라는 개념에는 일종의 파시즘적 광기가 보인다는 점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한 개인이 폄하되는 것, 이것이 파시즘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아우슈비츠의 광기를 기억해보자. 슈미트라는 유대계 독일인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유대인이고, 두 딸에게 한량없이 자상한 아버지이고, 슈베르트를 좋아하고, 보라색 옷을 즐겨 입고, 친구들과 축구 경기를 하는 것을 즐기고, 새벽 일출보다는 애절한 석양에 더 몰입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나치즘 치하에서 그는 유대인이란 민족적 특성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수많은 특성들을 부정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파시즘적 광기이다.

슈미트가 아우슈비츠에 투옥되었다고 하자. 아우슈비츠를 지키던 어느 젊은 독일 병사는 기차가 아우슈비츠에 도착해서 쏟아내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짜증을 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모두 속물이고 독일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암세포와 같은 존재라는 선전을 믿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우연한 기회에 이 젊은 독일 병사는 슈미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유대인이라는 특성을 제외하고 슈미트가 가진 대부분의 속성들이 자신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도 딸이 있고, 자신도 슈베르트를 좋아하고, 자신도 석양 풍경을 너무나 사랑했던 것이다.

뒷일은 눈에 보듯 뻔하지 않은가. 언젠가 유대인을 가득 채운 새로운 기차가 아우슈비츠에 들어왔을 때, 슈미트는 마침내 수용 초과로 가스실로 끌려가게 될 테니까. 바로 이 순간 젊은 독일 병사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전체 독일 사회와 독일군들이 모조리 파시즘의 광기에 휩싸인 노예라는 무서운 현실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결국 독일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모두 히틀러로 상징되는 파시스트들이 쳐놓은 광기의 덫에 걸려 서로를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 “여성 성기에 빗댄 치욕적인 말
여성이 압도하는 현실 남성들의 자기정당화”

‘보슬아치’ ‘김치녀’ ‘된장녀’ 등 몇몇 단어들로 파시즘적 광기를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기우라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어떤 개인을 규정할 수 있는 속성들은 무수히 많다. 인종, 국적, 성적인 정체성, 정치적 의식, 미적 감수성, 공동체 의식 등등. 아우슈비츠를 가장 깊게 고민했던 철학자 아도르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런 수많은 속성들 중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바로 파시즘의 비밀이다. 어떤 사람을 여성이라는 속성만을 남기고 나머지 모든 속성들을 간과하도록 만드는 개념이나 사유가 파시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간혹 여성들이 공동체적 가치보다는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에 더 경도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생존과 생계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 여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동물과도 같은 이기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63년에 시인 김수영이 ‘여자’라는 시를 통해 여성들의 이기적인 모습에 설움을 느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여자란 집중된 동물이다/ 그 이마의 힘줄같이 나에게 설움을 가르쳐준다/ 전란도 서러웠지만/ 포로수용소 안은 더 서러웠고/ 그 안의 여자들은 더 서러웠다/ 고난이 나를 집중시켰고/ 이런 집중이 여자의 선천적인 집중도와/ 기적적으로 마주치게 한 것이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생존의 위협에 내던져진 순간, 김수영은 여자들의 이기성이 그녀들의 본성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효과라는 걸 직감했던 것이다. 수용소에 갇힌 자신도 생존을 위해 기꺼이 이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는데, 남성보다 약한 여성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과외 공부를 둘러싸고 자기 아이의 성적을 위해 교과 과목을 채택하라고 압력을 넣는 어떤 어머니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면서 김수영이 설움을 느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우리 시인은 그 어머니의 이기적인 모습에 분통을 터뜨렸지만, 동시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삶에 설움이 들었던 것이다.

설령 ‘보슬아치’ ‘김치녀’ 혹은 ‘된장녀’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있다면, 그녀를 그렇게 만든 이유를 여성이라는 본성에서가 아니라 그녀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찾아야만 하지 않을까. 생존 경쟁에 불안을 느낀 몇몇 젊은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키우기보다는 김수영의 정직한 통찰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를 이렇게 이기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 남성과 여성 사이에 서러운 밥그릇 싸움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체제라는 사실을.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같은 현실이 극복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동물처럼 서로를 물어뜯으며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새기게 되리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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