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살아있는 자들에게 남겨진 과제

2014.05.18 20:32 입력 2014.05.19 14:22 수정
강신주 | 철학자

사인이 분명하지 않으면 관 뚜껑은 덮지 않는 법이다. 이것은 남겨진 자가 유명을 달리한 사람에게 해야 할 마지막 의무다. 그러나 지금 관 뚜껑이 서둘러 닫히려 하고 있다. 국민의 안전보다는 자본의 이윤에 손을 들어주었던 정권이 관 뚜껑을 재빨리 닫으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는 일이다. 지금 200만명에 가까운 조문객도 고인들의 명복을 빌면서 유족들을 애도하는 행렬에 합류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 이웃들의 마음이 이렇게도 곱고 선하기만 한 게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불안한 생각이 영 가시지가 않는다. 조문의 행위는 관 뚜껑이 닫히고 장례를 치를 때나 하는 행위니까. 지금 우리가 관 뚜껑을 닫으며 조문하려는 것은, 죽은 자들의 사인이 명백해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세월호 비극을 가능하게 했던 자본주의의 냉정한 논리와 그것을 비호하는 정권에 무기력을 느껴 세월호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빨리 뇌리에서 잊으려는 무의식적인 자기보호 본능 때문일까.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아직 살아있는 자들에게 남겨진 과제

모든 죽은 자들에게는 일말의 억울함도 없어야 한다. 이것은 남겨진 자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과제다. 그래서 우리가 세월호 참사의 유족들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죽은 자들의 억울함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간장이 끊어지는 것처럼 애통해하는 유족들이 아니라, 세월호에 갇혀 있던 사망자들과 실종자들에게 감정이입하여야 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본 편에 섰던 지난 정권과 현정권이 세월호 자체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정부가 국민의 생명을 우선적으로 구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잠시 기다리라는 선장과 선원들의 말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배는 전복되고 그들은 배 안에 갇혀버린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자신들의 발아래로 물이 차오르는 걸 보게 된다. “뭐지?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이렇게 우리는 죽는 건가. 이게 뭐야. 도대체 왜 우리는 죽어야 하는 거지?”

그렇다. 남겨진 유족들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도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식이 있다고, 그리고 그 자식을 잃으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냐고, 남겨진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된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우리는 침몰하는 세월호에 갇혀 공포에 질려 있던 아이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고인들의 억울함, 그 공포와 그 분노에 직면할 수 있다. 왜 자신들이 죽어 가는지, 그리고 왜 아무도 구조하러 오지 않는지를 몰랐기에 그들은 두려웠고 분노했던 것이다. 그리고 억울함을 품은 채 이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이야기해줄 차례다. 너희들은 이렇게 해서 침몰한 배에 갇히게 되었고, 너희들은 이렇게 해서 구조를 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리고 끝내 그래서 너희들은 억울하게 죽어가게 된 것이라고.

제대로 조문하려면 우리는 죽은 자들에게 그들의 죽음을 납득시켜야 하고, 다시는 그런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이 없도록 하겠다는 결의를 다져야만 한다. 불행히도 지금 우리는 통탄하고 있는 유족들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왜 그럴까. 아마도 우리는 자신도 이미 제2의 세월호, 제3의 세월호를 타고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 그 가공할 만한 구조적 압력에 지배되고 있다는 현실을 회피하려고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삶보다 이윤을 먼저 생각하는 자본의 탐욕, 그리고 그 탐욕을 규제하고 통제하기보다는 그것을 조장하는 권력의 본성. 이 구조가 바뀌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감히 세월호의 희생자들을 조문할 수 있다는 말인가. 너무나 씁쓸하고 답답한 일 아닌가. 운이 좋아 아직은 희생되지 않은 사람들이 운 나쁘게도 먼저 희생된 사람들을 조문하는 이 모양새가 말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 “죽은 자의 억울함이 없으려면 관 뚜껑을 서둘러 닫아선 안돼
왜 죽어갔고 구조가 안됐는지 억울한 사인을 명백히 밝혀야”

5월18일 현재 세월호 참사는 사망자 286명 그리고 실종자 18명을 남기고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이다. 지금 세월호 사건의 구조적 원인은 그대로 남겨둔 채, 그 구조에 의해 캐스팅되었던 배우들을 찾아서 단죄하려는 움직임만 횡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비극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구조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사망자이고 실종자가 아닐는지. 이런 엄연한 사실에 직면하는 것이 무섭고 두려웠던 것일까. 지금 우리는 희생자들을 조문하러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뿐이다. 잠재적 사망자와 실종자일 수도 있는 사실을 잊기 위해, 그래도 아직은 자신과 가족들이 살아있다는 다행스러운 상황을 확인하러 말이다. 하긴 조문은 오직 살아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 아닌가. 어쩌면 희생자들의 관 뚜껑을 서둘러 닫으며, 우리는 덧없는 소원 하나를 가슴속에 품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관 뚜껑이 닫히는 순간, 앞으로 이런 비극의 가능성도 관 속에 영원히 묻혔으면 하는 소원 말이다.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죽은 사람은 귀신이 되어 살아있는 사람에게 나타난다고 한다. 이유도 모른 채 죽은 것이 억울해 사인을 밝혀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가 죽은 원인이 남겨진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원인이라는 걸 경고해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 사인이 명료하지 않은 시신의 관에 서둘러 뚜껑을 닫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건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이 자신의 범죄를 은닉할 때나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인이 분명하지 않다면, 우리는 시신의 관에 뚜껑을 성급히 닫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죽음에 직면했을 때 고인들이 혀를 깨물며 되물었던 질문에 대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왜 나는 죽어야 하지? 왜 아무도 구조하러 오지 않는 거지?”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건 고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동일한 사인이 제거되지 않은 채 우리 주변을 떠돌아다니고 있다면, 어느 순간 우리도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고인들이 바라지 않는 건 어쩌면 바로 이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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