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일기

2014.08.17 20:39 입력 2014.08.18 11:47 수정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 취업일기

한전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주부검침원 자리를 부탁하려고 이력서를 들고 간다 그래도 바짝 하면 월 백이십에 공휴일은 쉬니 그만한 일자리도 없다 싶어 용기를 낸 길, 벌써 봄이라고 이 땅에 뿌리를 박는 민들레 제비꽃 들, 그 조그맣고 기대에 찬 얼굴에 대고 조만간 잔디에 밀려나갈 것이라고 나는 말해줄 수 없다 그에 비하면 밀려날 걱정 없이 남의 뒤란에 걸린 계량기나 들여다보면서 늙는 것도 괜찮다 싶다가도 그래도 뭔가 좀 억울하고 섭섭해지는 기분에 설운 방게처럼 옆걸음질 치는데 명동성당 앞에는 엊그제 돌아가신 추기경님 추모 행렬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대통령 앞에서도 할 말 다했다는 추기경님도 이 땅에서는 임시직이셨나, 그나저나 취업이 되더라도 일이년은 기다려야 한다는데 그동안은 앳된 얼굴의 저 민들레처럼 저 제비꽃처럼 내일 따윈 안중에도 없이 팔락거려도 될까

- 문성해(1963~)

[경향시선 - 돈 詩]취업일기

△ 취업대란의 시대다. 고졸 취업률이 대졸 취업률보다 낮다. 설상가상 고졸 취업의 50%가 임시직이고 40%가 일용직이다. 여성의 경우는 더 열악하다. 명색이 여성대통령에 나왔고 국회의원 및 장관을 비롯한 고위공무원 여성비율이 15%에 가까운 나라임에도, 지난해 대졸 여성 고용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33개국 중 최하위였고 여성 임시직 비율은 가장 높았다. 마트점원, 식당보조, 육아·가사 도우미, 학습지 방문교사…. 주부취업자의 월 평균 수입은 ‘백이십’ 안팎이다. 생업전선에 뛰어드는 전업주부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출산과 육아, 살림으로 경력이 단절되었던 주부들에게 취업시장은 거대한 장벽이다. 장벽을 넘었다 하더라도 고용조건은 열악하다.

“봄이라고 이 땅에 뿌리를 박는 민들레 제비꽃” 등속은 사시사철 초록 동색인 “잔디”와 생래적으로 다른 품종이다.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여성이 남성과, 기혼여성이 미혼여성과 생래적 취업 조건이 다르듯이. 야생풀꽃은 잔디밭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내일 따윈 안중에도 없이 팔락거리는” 을(乙)들이 그러하듯이. “밥 앞에서 보란 듯이 밥에게 밀린 인간”(‘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들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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