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의 회화

2015.05.10 20:39 입력 2015.05.10 20:41 수정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 컵의 회화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
내 피가 돌고

그런 날,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로

씻어 엎으면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고

난간을 따라 걷자
깊은 곳에서
녹색 방울이 튀어 오른다
살을 파고
모양을 그리면서

백지 위 젖은 발자국은
문고리가 된다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

- 손미(1982~)

[경향시선 - 미래에서 온 詩]컵의 회화

△ 사물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사물의 화법을 구사할 수 있는 주체가 되어봐야 한다. 사물의 겉이 아니라 속을 거닐고, 그 안에서 쉽사리 재현되지 않는 의문스러운 자신과 대면해보는 것. 이것이 사물을 통해 세계를 보는 방법이 아닐까.

여기에 무언가 담겨져 있는 컵이 있다. 컵에 담겨 있는 액체는 무엇일까. 피, 투명한 동물, 녹색 방울, 젖은 발자국 등으로 고정화되지 않고 분유되는 이미지들이 컵 속에 담겨 있을 법한 액체의 알리바이를 마련해주고 있지만, 사실 이 시에서 범상하게 느껴지는 점은 컵이 어떤 액체를 구속하고 있는 상태다. 더 범박하게 말하면, 고정된 윤곽이 없는 액체들에 테두리를 만들어주는 컵이란 억압이지만 그 억압으로 인해 시시각각 달라질 수 있는 ‘다른 몸들’을 보장한다. 그러므로 컵은 액체를 억압하는 동시에 보존하고 이동시킨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컵은 비우는 용도인가. 채우는 용도인가. 아마도 손미는 컵을 통해 비정형의 가능성을 강하게 노출시키려는 것 같다. 그러면서 스스로 액체성의 정념 주체가 되어 어떤 몸으로든 변신할 수 있고, 이곳의 약속이 아니라 늘 다른 곳으로 나아가겠다는 결의를 보여준다.

스푼으로 내 몸에 담긴 생각 하나를 휘젓는다. 무너지고 훼손된 것들 속에서 잠시간의 희망이라도 기록할 수 있다면 내일은 좀 더 건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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