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

2015.05.17 21:12 입력 2015.05.17 21:13 수정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 인과

개기월식;
양팔을 벌리고 달의 테두리를 따라 걸었다
무표정의 뿔이 솟았다
모두 짙어질 때를 기다려 혼자 옅어졌다
눈과 눈의 먼 악수
마음에도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와
겁에 질려 모두 먹어치웠다
성실한 마음;
층층계 모서리에 거미가 줄을 쳤다
빈 거미줄에 마른 나뭇잎이 걸린다
거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푸른 불꽃;
길게 혀를 빼물고 눈부시게
잔다
의자가 놓인 위치는 의자의 기분을 설명한다;
사물은 입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호감을 샀지만
인간은 사물을 사랑하므로
사물의 입을 찾아주었다

- 유계영(1985~)

[경향시선 - 미래에서 온 詩]인과

△ 삶에서 명쾌한 답이 존재한다면, 그 답을 위해 우리가 한 생애를 복무할 수밖에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건조할 것인가. 본질과 현상, 절대와 상대, 필연과 우연 등등의 이분법적 사고 논리로 세계를 판단해 온 오랜 관습이나 이미 신화화된 것들이 그러하고, 그런 토대들을 거부하려는 ‘예외의 시각’들 또한 그렇다. 어떤 질서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기 위한 혁명이란 혁명인 동시에 그 이전의 질서를 강하게 노출시킨다. 영원불변하는 진리나 절대적 기준이란 없다. 인간의 사유체계는 환경 위에 놓여 있는 것이고, 그 환경을 가장 예민하게 겪는 순간이나 반응 중 하나가 문학일 것이다.

이 시에서 개인의 기분이나 마음에 주목해서 세계를 읽어보겠다는 의지는 논리적으로 해명이 되지 않는 자리이기 때문에 빛이 난다. 움직이지 않는 거미에게서 성실을 발견하거나 입이 없는 의자에게서 낯선 목소리를 듣는 일은 어쩌면 아주 무용한 듯 보이지만, 그렇게 세계를 정지시키거나 느리게 하는 가운데에서 순간마다 탄생되는 혁명이 있고, 미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토록 난해한 ‘인과’는 유계영에게는 아주 절실한 ‘우연’인지도 모른다. 답을 물을 수 없는 곳의 매혹을 찾아, 그 미지를 찾아 오래 달려왔다. 헛된 진리에 대한 믿음보다 건강한 진보를 향한 의사결정이 우리를 바꿀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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