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맛’

2015.10.01 21:04 입력 2015.10.02 10:27 수정

오래전 그릇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 취미라고 해서 모아서 완상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쓰는 거다. 음식과 그릇은 서로 어울려야 제맛이 나는 게 당연한 이치다. 일본의 전설적인 미식가이자 도예가였던 기타오지 로산진은 “음식의 옷은 그릇이다”라고 얘기했다. 옷이 입는 이의 품위와 태도를 표현하듯이, 음식도 그렇다.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그릇맛’

따뜻한 국밥 맛이 아무리 좋아도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뚝배기에 담아서는 진짜 맛이 안 난다. 맛이란 물리, 생화학적인 결과이지만 심리적인 문제도 많이 차지한다. 그래서 나는 사들인 옛 그릇에 국과 국수를 담아 먹는다. 실제 쓰는 그릇이니 개당 몇 만원에서 몇 천원 미만의 실용적인 대중 그릇들이다. 어느 여염집이나 술청에서 쓰였을 그런 모습이다. 투박하고 무늬도 정돈된 맛 없이 삐뚤빼뚤하다. 그런 그릇에 일상의 음식을 담아 먹는 것은 행복이다. 주로 1960~1970년대에 썼던 것들이고 세월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다. 누가 이 그릇을 썼을까, 이 그릇에 밥 먹던 이들은 뭐하고 살까, 죽었을까 살았을까 그런 상상을 해본다. 이 그릇이 아직 새것일 때 담겼던 음식은 무엇일까 그려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몇 해 전만 해도 이런 그릇 값이 아주 쌌고, 더러 귀품(?)이라 할 멋진 손 그림 무늬가 새겨진 것들도 있었다. 요즘은 이런 것들도 골동품 축에 드는지라 찾기가 어렵고 값도 꽤 나간다.

옛 그릇은 하나같이 무겁고 듬직하다. 그 안에 국밥 한 그릇을 담고 상에 놓여 있는 모양이, 막 호각을 불기 전 숨을 고르는 천하장사 씨름선수 같다. 그릇이 무겁고 두꺼우니 열을 오래 보존한다. 국밥이나 국 중심의 식생활에 아주 요긴한 제법이었을 것이다.

한 가지 드는 의문점. 왜 우리는 이런 그릇을 포기했을까. 국과 찌개, 김치와 반찬으로 이루어진 한식의 얼개는 변하지 않았는데 왜 그 그릇들은 다 사라져버렸을까. 조선 백자 사발이 개밥그릇으로 쓰이고 있었다는 전설처럼, 우리는 왜 전래의 그릇을 상에서 내려버렸을까.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그릇맛’

그 틈에 끼어들어온 것이 바로 스테인리스와 양은 그릇이었다. 값싸고 닦기 좋으며 심지어 헌것은 되팔 수도 있었다. 그런 금속의 뒤로 멜라민 수지가 대표하는 석유화학제품이 우리 그릇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릇 회사들은 혼수용으로나 도자기 그릇을 팔았는데, 그나마도 미국 회사가 ‘안 깨지고 가볍다’는 마케팅으로 그릇 시장을 장악해 갔다. 그런 그릇들의 공통점은 우리 전래 그릇과 모양과 무게가 달랐다는 것이다. 가벼운 것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가사노동의 주체인 여자들이 더 가벼운 그릇을 원했기 때문이다. 설거지 편하고, 간수하기 좋았다. 외국 것에 대한 갈망도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우리는 진짜 우리 그릇을 잃었다. 그렇다고 옛 그릇을 그대로 모방하여 쓸 일도 아니다. 멋있고 전통의 기운이 있으면서 사용하기도 편한 그릇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일본 요리에는 모리쓰케(盛り付け)라는 말이 있다. 요리와 그릇이 어울리게 잘 담아내는 걸 말한다. 훌륭한 요리사들은 이 정신을 가지고 요리한다. 우리말의 ‘담음새’ 정도에 해당할 텐데, 과연 우리에게 이런 열의가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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