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줄 아는 총명함

2015.10.13 21:32 입력 2015.10.13 21:33 수정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오늘 우리는 총명하다는 말을 주로 어린아이에게 사용한다. 심지어 기억력 향상과 두뇌 활성화에 좋다고 하는 총명탕이 수능시험을 앞두고 많이 팔리기도 한다. 국어사전에도 “썩 영리하고 기억력이 좋으며 재주가 있다”고 풀이되어 있다. 그런데 총명(聰明)이라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 이 어휘의 첫 출전인 <주역> 정(鼎) 괘에서의 뜻은 귀와 눈이 밝은 것을 뜻하며, <맹자>에 나오는 사광(師曠)의 총과 이루(離婁)의 명은 각각 세상에서 가장 청력과 시력이 좋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청력을 개선시키는 것으로 의사소통뿐 아니라 학습능력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고, 한의학에서 건망증이나 치매를 치료하는 처방들은 시력과 청력을 강화하는 약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경향신문 2013년 7월10일 한동하, ‘웰빙의 역설’). 그러고 보면 글자 그대로의 총명함이 오늘 쓰이는 영리함의 뜻과 그리 멀지 않은 셈이긴 하다. 잘 듣고 잘 보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아는 것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송혁기의 책상물림] 들을 줄 아는 총명함

<서경>에서 총명은 군주의 덕을 가리킬 때 주로 쓰였다. “모든 이들에게는 욕망이 있어서 군주가 없으면 혼란하게 되니, 하늘이 총명한 이를 내어서 다스리게 하였다”고 했고, “오직 하늘만이 총명한데 성스러운 군주가 이를 본받는다”고 했다. <주역>에서 “총명하고 예지가 있는 사람이라야 백성과 근심을 함께할 수 있다”고 한 것이나 <중용>에서 “성인이라야 총명과 예지로 백성들에게 군림할 수 있다”고 한 것도 모두, 군주의 덕목으로 총명함을 든 예들이다. 본디 훌륭한 군주를 뜻하는 성인(聖人)이라는 말 역시, 애초에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태어난 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잘 듣고 잘 보아서 지혜로운 사람을 뜻한다.

들을 줄 모르는 통치자를 만나는 것만큼 큰 재앙은 없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혼자만의 지식과 경험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귀가 얇아 좌고우면하는 것과 귀를 열고 널리 듣는 것은 다르다. 여러 이견과 갈등이 있는 사안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역사교과서의 국정 단일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나 적법한 절차를 거쳐 추대된 국립대 총장들을 임용해달라는 목소리마저 불순한 목적을 지닌 것이라 여겨 아예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다. 더구나 지금은 군주의 시대가 아니라 민주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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