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고 아이들의 교실

2015.10.23 20:21 입력 2015.10.23 20:22 수정
전우용 | 역사학자

“저기 있는 낡아빠진 문갑은 뭐야?” “응, 저거 어머니 유품이야. 내가 사 드렸던 건데, 생전에 무척 아끼시던 물건이라 어머니 생각날 때마다 만져 보려고.” “집구석도 좁은데 구질구질하게 저런 걸 왜 여태 끌어안고 있어? 당장 내다 버려.” “무슨 말을 그리 심하게 해? 당신 어머니 유품이라면 그럴 수 있어?”

[세상읽기]단원고 아이들의 교실

이 심상한 대화가 결국 한 쌍의 젊은 부부를 파경으로 몰아갔다. 듣기로는, 이와 비슷한 문제로 다투는 부부가 적지 않다고 한다. 함께 사는 부부라 해도, 같은 사물에서 얻는 감성의 깊이가 같을 수는 없다. 한쪽에게는 자기 삶의 중요한 순간과 중요한 사람에 관한 애틋한 기억이 담긴 소중한 물건이지만, 다른 쪽에게는 그저 구질구질할 뿐인 물건들은 곳곳에 널려 있다. 제3자가 이런 상황에 개입할 수 있다면, ‘올바르고 균형 잡힌’ 판단은 무엇일까? 경제적 합리성만 따지는 사람이라면 버리라고 할 테지만, ‘인정상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지금 똑같은 일이 단원고에서 벌어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250여 학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의 수다와 웃음과 말썽과 한숨이 깃든 교실을 그대로 보존하고 싶어 한다. 그 아이들이 살아 있다면 곧 졸업할 테고, 그러면 그 부모들도 더 이상 ‘단원고 학부모’가 아닐 터이다. 그 아이들이 살아 있다면, 그들도 대학생 학부모가 되었다가 직장인 부모가 되었다가 다시 시아버지나 장모가 되었다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시계는 2014년 4월16일에서 멈췄고, 그들의 남은 평생도 ‘단원고 학부모’라는 이름에 속박되어버렸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을 착하게 잘 들었던 아이들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부모들의 마음속에, 그들이 쓰던 물건들 속에 아련한 이미지로만 남았다. 그 아이들이 매일 앉아 있던 교실은, 그 부모들에게는 남은 평생 아이들의 영혼과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영매(靈媒)다. 죽은 아이가 못 견디게 보고 싶을 때, 아이가 쓰던 교실로 달려가, 아이가 쓰던 책상을 부둥켜안고 한바탕 눈물이라도 쏟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게 그 부모들의 바람이다.

그런데 1, 2학년 학부모들 일부와 학교 운영위원회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희생자 학부모들을 이미 학교와 인연이 끊어진 사람들로 본다. 그들은 또 학교는 살아 있는 아이들의 오롯한 공간이 되어야지 죽은 아이들을 기리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지금 단원고에 다니는 아이들, 그리고 앞으로 다닐 아이들을 위한 교실도 넉넉지 않은데, 희생자들이 쓰던 교실을 그대로 보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실이 보존되면 아이들 공부에 방해될 것이라고도 한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단원고를 다른 이름의 학교로 바꾸고 싶을 것이다.

죽은 아이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빈 교실들을 옆에 두고 공부할 자식들을 세심하게 염려하는 부모들의 마음을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희생자 부모들의 아픈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는 박정함이 느껴져 마음이 아프다. 게다가 세월호 참사의 당사자는, 죽은 단원고 아이들과 그 부모들만이 아니다. 사람을 이윤 창출의 도구로만 보는 냉혹하고 천박한 자본, 우왕좌왕하다 300여명이 산 채로 수장되는 꼴을 온 국민이 지켜보게 하고서도 책임은 개별 기업에 몽땅 떠넘긴 무능하고 비겁한 정부, 권위에 대한 순종과 학생들끼리의 경쟁만 가르쳐 온 일방적 교육. 세월호 참사는 현재의 한국 사회에 내재한 이 모든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그렇기에, 참사 직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겠다’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했던 것이다. 희생된 단원고 아이들의 교실 안에 그들의 체취를 보존하는 것은, 그 결의의 기억을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두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 사회 전체의 미래와 연관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안에 개입할 자격이 있는 경기도교육청은 당사자들끼리 합의하라며 수수방관하고 있다. 내년 2월 단원고 졸업식이 끝나면, 희생자 학부모들은 당사자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 그렇게 죽은 아이들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것이 ‘올바르고 균형 잡힌’ 처사일까? 역사교과서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다 지워버려야 ‘올바르고 균형 잡힌’ 역사책이 된다고 주장하며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반문명적 행위를 자행한 정부를 지탱하는 것은, 자기 주변에서 아픔과 슬픔, 괴로움 등 모든 부정적인 기억의 요소들을 지워버리려는 평범한 욕망들이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왜 아팠는지를 잊으면 또 아프게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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