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안철수 의원께

2016.01.03 20:41 입력 2016.01.04 14:58 수정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새해 첫 편지의 수신인으로 당신들을 불러낸 것은 올해에 총선이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총선도 총선이지만, 대한민국 정치시스템에 대한 제 근본적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이제 당을 서로 달리하고 있지만, 당신들은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한 당의 울타리 안에 있었습니다. 그 당의 이름은 새정치민주연합이었고, 지금은 더불어민주당이라고 불립니다.

안 의원은 자신의 신당을 만드느라 분주하신 걸로 압니다. 저는 올해 총선 결과가 어떻게 될지 지금으로선 가늠도 못하겠습니다. 분열된 야당으로는 여당과 싸워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이 상식이기는 하지만, 대한민국 선거의 역사를 볼 때 그것이 철칙은 아닙니다. 1988년 총선에서 야당은 분열돼 있었지만, 한국에서 여소야대가 처음 이뤄진 것은 그 총선에서입니다.

[고종석의 편지] 문재인·안철수 의원께

한 당에서 몹시 불편한 관계였던 당신들 가운데 어느 쪽의 잘못이 더 컸는지에 대한 판단은 삼가겠습니다. 누구의 잘못이 더 크든, 당신들의 분열은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신들의 분열을 반영한 것인지 아니면 그 분열을 재촉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들 지지자들 사이의 적대감은 그들과 새누리당 지지자들 사이의 적대감보다 오히려 더 크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것은 내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질 개연성을 크게 낮추고 있습니다.

당신들 가운데 한 사람은 반드시 내년 대선에 출마할 것이고, 어쩌면 두 사람 다 출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권에서 또 다른 후보가 나설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다가오는 4월 총선 결과에 크게 달려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 대선 정국에서 안철수 후보를 지지했고, 안 후보가 사퇴한 뒤에는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했습니다. 안철수 후보를 지지한 것도,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한 것도 당신들 가운데 한 사람이 꼭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판단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안 후보를 지지한 것은 박근혜 후보의 청와대 입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안 후보뿐이라는 판단 때문이었고, 안 후보의 사퇴와 함께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거의 확신했음에도 제가 선호했던 어느 여성 노동자 후보가 아니라 문 후보에게 투표한 것은,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것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결국 제가 지녔던 비관적 확신은 현실화했고, 제가 바랐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는 민주주의를 파괴한 독재자의 딸이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대통령이 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뒤에 밝혀지기로는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가 개입했으니, 그것이 순수하게 민주주의적인 방식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그 개념을 흔쾌히 받아들이든 그러지 않든, 당신들은 ‘영남패권주의’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당신들은 영남 출신이고, 제 판단에 문 의원은 영남패권주의를 꽤 표나게 실행해오셨습니다. 서남대 김욱 교수가 지난해 말 출간한 <아주 낯선 상식>(개마고원)이라는 책을 당신들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영남패권주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한국의 지역모순을 명쾌하게 파헤친 책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정치인들 모두가, 더 나아가 지식인들을 포함해서 되도록 많은 한국인이 이 책을 읽기 바랍니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도 대한민국에 영남패권주의가, 지역모순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역모순은 대한민국 국가의 주요 모순입니다. 이 모순의 해소에 눈감는 개혁이나 진보담론은 죄다 거짓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말의 올바른 의미에서 사용되는 개혁이나 진보는 차별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향 출향을 싹 쓸어 모아도 영남인은 대한민국 인구의 반에 크게 못 미치지만,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 패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1961년 이후 지금까지 55년 동안, 영남 출신 인사가 최고권력자로 군림한 기간은 50년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은 더 길어질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재벌 대부분은 영남 출신이거나 영남과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 있습니다.

청와대를 비롯한 권력기관과 재벌기업에서는 영남방언이 표준어 행세를 합니다. 이것은 극히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저는 당신들이 이런 비정상적 상황을 정상적으로 바꾸는 데 진력해주기를 곡진한 마음으로 기대합니다. 영남패권주의의 소멸은 영남인들의 도덕적 성찰이나 너그러움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님을 저는 잘 압니다. 공평한 제도에 기반을 둔 물리적 강제가 없으면, 어떤 종류의 패권주의도 스스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야권이 분열돼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개헌저지선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야권이 합해서 100석을 얻지 못하면, 새누리당이 개헌을 통해서 영구집권을 꾀할 거라는 음모론이 나돕니다. 저는 반-새누리당 자유주의적 유권자로서, 이번 총선에서 야권이 선전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선전을 하더라도, 저는 오히려 야권에서 개헌투쟁을 벌여주기 바랍니다. 이것은 제가 <아주 낯선 상식>을 읽으며 굳히게 된 생각입니다. 지금의 변형된 대통령 중심제와 결합된 국회의원 단순다수대표제 아래에서는 영남패권주의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이 제도가 승자독식 체제이고, 영남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개헌은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이고, 그 의원내각제 아래서의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입니다. 이 방향의 개헌은 영남패권주의를 해소할 뿐만 아니라, 사표를 거의 완전히 없애서 표의 등가성을 이룰 수 있는 효과를 낳아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크게 신장할 것입니다.

정당이 유권자들에게서 받은 지지율에 정확히 비례해 의석을 배분하는 독일식 비례대표제에는 당신들도 찬성하시리라 믿습니다. 집권당에만이 아니라 거대 야당에도 불리한 제도이지만, 저는 민주주의에 대한 당신들의 신념에 비추어 그리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원내각제는 당신들 두 사람 다에게 아마 맞갖지 않으리라 짐작합니다. 그것은 당신들이 대통령 중심제 아래서의 대통령을 꿈꾸고 있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던 제2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이 5·16 군사반란을 불러왔다는 경험에도 근거하고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현행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유지하거나,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와 결선투표제로 개헌을 하자는 의견인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는 이제 의원내각제를 견뎌낼 만큼은 넉넉히 근육을 키웠습니다.

게다가 현행 대통령 중심제든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든, 넓은 의미의 대통령 중심제는 독일식 비례대표제와 궁합이 맞지 않습니다.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표의 등가성에 바탕을 두어 소수파의 원내진입을 보장하고 연립정부의 구성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제 아래서는 원칙적으로 연립정부가 불가능합니다. 김대중 정권 전반기의 DJP연합이나 노무현 정권이 구상했던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은 대통령이 스스로 자신의 권한을 제도 바깥의 영역에서 나누거나 넘기는 것이었지, ‘제도적’ 연립정부는 아니었습니다. 대통령 중심제 아래서의 그런 ‘유사연정’은 대통령이 원하면 아무 때나 거두어들일 수 있는 불안정한 제도입니다. 게다가 대통령 중심제가 여소야대와 결합하면, 야당은 늘 대통령 탄핵소추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정치적 불안정을 가져올 것은 자명합니다.

제6공화국 헌법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으면서도, 저는 최근까지 견결한 호헌론자였습니다. 그 이유의 첫째는 개헌이라는 것이 1960년 4월혁명 직후나 1987년 6월항쟁 직후처럼 시민의 정치적 진출이 극적으로 활발해진 시기를 빼놓고는 예외 없이 집권세력의 권력연장을 위한 헌법개악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수마발 국회의원들보다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대통령 중심제의 대통령이 더 높은 정치윤리를 지닐 것이라는 추론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6공화국 들어서 거의 모든 대통령이 국회의원들의 평균적 정치윤리보다는 더 높은 정치윤리를 지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이명박 정권 들어서 흔들리기 시작했고, 박근혜 정권 들어서는 완전히 사그라지고 말았습니다. 대통령 중심제 아래서의 대통령이 정치윤리에서 국회의원들보다 나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오랜 호헌론을 접고 개헌론자로 전향했습니다. 저는 의원내각제 독일식 비례대표제로의 개헌을 원합니다. 이번 총선 이후 개헌 투쟁에 들어가든, 아니면 차기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개헌을 내세우든, 당신들이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의원내각제 아래서의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영남패권주의를 약화하거나 없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제7공화국을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다가가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하신년(謹賀新年)! 대한굴기(大韓崛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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