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의 잃어버린 딸들

2017.10.26 20:56 입력 2017.10.26 21:00 수정

KBS 주말극 <황금빛 내 인생> 포스터

KBS 주말극 <황금빛 내 인생> 포스터

1992년 8월, 대기업 해성그룹 부회장 부부의 세 살배기 외동딸 최은석이 실종된다. 경찰은 공개수사를 통해 행방 추적에 전력을 다하지만 끝내 찾는 데는 실패한다. 25년 뒤, 해성그룹에 실종된 딸에 관한 익명의 제보가 들어온다. 한 60대 일용직 노동자 가정의 쌍둥이 자매 중 하나가 해성가의 잃어버린 딸이라는 제보였다. 현재 KBS에서 방영 중인 주말극 <황금빛 내 인생>의 도입부다. 보통 중장년층 시청자들이 즐겨보는 주말극은 시청률은 안정적인 반면 화제성은 부족한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요즘 젊은층 사이에서도 큰 화제다. 소위 막장드라마의 필수 흥행 공식이라 불리는 출생의 비밀을 다루면서도 고유의 변주를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드라마라면 수십 회를 끌 법한 비밀을 초반부터 밝히는 신속한 전개와 흔히 ‘친딸’을 질투하는 악녀로 묘사되는 ‘가짜 딸’이 치열한 윤리적 고민에 빠지는 인물로 그려지는 점 등이 확실히 색다르다.

하지만 더 핵심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황금빛 내 인생>의 화제성이 급속도로 높아진 계기는 그 유명한 ‘삼천만원 숙제’ 에피소드였다. 해성그룹 총수의 장녀 노명희(나영희) 대표는 서민 가정에서 자라난 딸 서지안(신혜선)에게 재벌가의 ‘애티튜드’를 가르치기 위해 현금 삼천만원을 하루에 다 쓰고 오라는 과제를 준다. 이 장면은 사회관계망서비스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빠른 속도로 확산되며 드라마의 인지도가 급상승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의 가장 큰 인기 요인은 출생의 비밀 코드 이면에 내재된 인생역전 판타지를 그 어떤 드라마보다 노골적으로 자극하는 데 있다.

이는 드라마의 주요 러브라인에도 나타난다. 표면적으로는 일찌감치 출생의 비밀을 깨달은 지안이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며 신분상승 판타지의 아이러니를 그리는 듯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판타지를 굳건하게 할 또 다른 보험장치를 두고 있다. 바로 해성그룹 후계자 최도경(박시후)과 지안의 로맨스다. 지안은 해성가의 가짜 딸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훗날 도경의 연인으로 해성가에 귀환할 운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단적인 사례로, 지안이 ‘상류층 사모님들’ 앞에서 풍부한 예술 지식을 드러내며 ‘친딸 테스트’를 통과하는 장면은 다른 드라마에서 재벌 시어머니가 서민 출신 며느리를 무시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마련한 ‘교양 테스트’ 클리셰와 꼭 닮아 있다. 결국 이 드라마는 출생의 비밀과 신데렐라 로맨스라는 이중의 장치를 통해 신분상승 판타지를 공고히 한다.

사실 이 분야의 원조는 소위 막장드라마의 대모로 불리는 임성한 드라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전까지 출생의 비밀이 단순한 인기 소재였다면, 임성한은 그것이 한국드라마를 지배하는 데 가장 지대한 공을 세웠다. 2005년 SBS에서 방영된 주말드라마 <하늘이시여>가 대표적이다. 임성한은 여기서 부자 엄마가 젊은 시절 잃어버린 가난한 딸을 의붓아들과 결혼시켜 며느리로 맞아들인다는 가공할 발상을 선보인다. 유사근친애 코드로 말초신경을 자극함과 동시에 출생의 비밀과 신데렐라 로맨스를 겹쳐 특유의 속물주의를 극대화한 전개였다. <하늘이시여>의 대성공 이후 부자 부모의 핏줄 찾기는 연속극 장르의 필수 흥행 공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2010년대 들어 이를 잘 계승한 작가는 새로운 막장 퀸으로 떠오른 김순옥 작가였다. <하늘이시여>급의 신드롬을 몰고 온 2014년 MBC 드라마 <왔다! 장보리>에서 김순옥은 신분상승 판타지의 규모를 몇 배로 키운다. 어린 시절 부모와 헤어진 주인공 장보리(오연서)가 잃어버린 신분을 회복하는 것은 단순히 부잣집 딸이 되는 것을 넘어서 가업의 후계자로 성공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동시에 재벌 후계자인 연인 재화(김지훈)와의 신분 격차를 해소하는 길이기도 하다. 출생의 비밀 하나로 삶의 모든 난관이 해결되고, 본래의 금수저 집안 이상의 다이아몬드 계급 진입에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황금빛 내 인생>은 이처럼 임성한, 김순옥의 뒤를 이어 출생의 비밀 코드의 성공적 계보를 따르는 작품이다.

문제는 이 계보 속 주인공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에 있다. 출생의 비밀을 통해 신분상승에 성공하는 것은 모두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순종하는 딸들이다. 가령 <하늘이시여>의 자경(윤정희)은 임성한 드라마에서 가장 유순하고 수동적인 여주인공이었다. 모친 지영선(한혜숙)이 그녀를 며느리로 들이려 한 이유에는 아들 왕모(이태곤)의 짝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소위 ‘여성스러운’ 성품도 한몫을 했다. <왔다! 장보리>도 마찬가지다. 장보리는 혈연관계도 아닌 엄마와 딸을 돌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가족적 가치의 화신과도 같은 인물이다. 반면, 노골적인 속물주의를 드러내며 그녀와 경쟁했던 연민정(이유리)은 친모를 부정하는 패륜적 인물이었다. 결말에서 물리적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히 전자다.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재벌가의 잃어버린 딸들

이러한 특징은 <황금빛 내 인생>에서도 반복된다. 지안은 해성가의 친딸인 서지수(서은수)의 대사를 통해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착한 딸이자 언니로 선한 성품을 입증받는다. 실제로 지안은 생계의 한계에 부딪혀 재벌가에 입성한 뒤에도 기존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늘 품고 지낸다. 엄마가 자신을 위해 엄청난 사기극을 벌인 것을 알게 된 뒤에도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비밀을 말하지 못한다. 물론 지안은 희생한 만큼 기존 가족극의 관습을 따라 신분상승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현실에서는 탈가부장제를 선언하는 여성들의 비혼율이 날로 높아가는 가운데 드라마는 ‘착한 딸’들이 가족제도에 순종하며 보상받는 판타지를 오히려 더 공고히 하고 있다. <황금빛 내 인생>을 쓴 소현경 작가의 전작이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굴레를 벗어나려 한 여성의 자립을 그린 <내 딸 서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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