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우병우·양승태 통화설

2018.01.25 20:54 입력 2018.01.25 20:56 수정

[편집국에서]취재파일-우병우·양승태 통화설

2016년 6월 우병우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에 관한 취재보고가 들어왔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박근혜 정권 최고 실세였다. 검찰은 물론이고 경찰, 국정원, 국세청 등에 심복을 심어두고 수사와 범죄 정보를 독점하고 있었다. 그의 영향력이 사법부까지 미치고 있다는 얘기도 돌았다. 정치부 후배가 법조계 고위 인사에게서 들은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요약하면 ‘우병우 수석이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양 대법원장이 전화를 끊은 뒤 격노했다. 양 대법원장이 이런 사실을 법원행정처 간부에게 얘기했다’는 것이었다. 제보자는 ‘박근혜 정부 초기에는 김기춘 비서실장이 양 대법원장과 직접 통화했다. 김 실장이 퇴직하자 우 수석이 그 역할을 맡았다’고 덧붙였다.

민정수석이 대법원장에게 전화를 했다? 사실이라면 매우 부적절한 처사로 경천동지할 뉴스였다.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은 대통령과 국회의장에 이어 국가 의전서열 3위이다. 우 수석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차관급에 불과하다. 양 대법원장은 서울대 법대 66학번, 우 수석은 84학번이다. 사법연수원 기수도 양 대법원장이 17기나 앞선다. 우 수석 행동은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맞담배를 피운 격이다. 양 대법원장의 격노는 우 수석이 예의에 어긋나거나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라는 추정도 가능했다. 김기춘 실장이 양 대법원장과 통화했다는 것도 문제 소지가 다분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저런 인연이 얽혀 있겠지만 청와대와 대법원이 내통했다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제보를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우 수석이 순순히 알려줄 리 만무했다. 양 대법원장도 마찬가지였다. 우 수석과의 통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므로 증거를 내밀지 않는 한 부인할 것이 뻔했다. 취재 제약도 많았다. 무엇보다 보안이 중요했다. 얘기가 퍼지면 특종을 놓치게 되므로 이곳저곳 여러 사람에게 묻고 다닐 수 없었다.

양 대법원장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법원행정처 고위 간부에게 먼저 물어봤다.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알고 지내는 검사장 출신 변호사에게 물었더니 그런 소문을 듣긴 했다고 했다. 시간을 더 쏟아도 추가로 얻는 정보는 제한적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당사자에게 묻기로 했다. 만에 하나 두 사람이 입을 맞출지 모르기 때문에 오후 6시로 시간을 정해 동시에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법원 출입기자가 대법원 청사 현관에 서 있다가 퇴근하는 양 대법원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직원들이 막았고 양 대법원장은 들은 체도 않고 지나쳤다. 한 시간쯤 뒤 법원행정처 관계자를 통해 “통화한 일이 없다”는 답변이 왔다. 우 수석은 청와대 관계자를 통해 연락이 닿았다. 그 역시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전해왔다. 그러면서도 우 수석 측은 “대법원장이 뭐라고 대답했냐”며 되물어왔다. 통화한 적이 없으면 그것으로 끝인데 양 대법원장의 답변 내용을 궁금해하는 이유가 마음에 걸렸다.

최근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가 발표한 ‘판사 블랙리스트’ 조사 보고서를 보면서 양승태·우병우 통화설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대법원은 핫라인을 수시로 가동한 것이 드러났다. 청와대는 재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댓글 대선개입’ 사건의 1·2심 결과를 물었고, 법원행정처는 성심껏 답했다. 청와대는 1심과 달리 2심에서 원 전 원장에게 실형이 선고되자 노골적으로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우병우 수석 → 사법부에 대한 큰 불만을 표시하면서, 향후 결론에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상고심 절차를 조속히 진행하고 전원합의체에 회부해줄 것을 희망’이라는 내용이 담긴 법원행정처 문건이 그 증거다. 재판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삼권분립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이었지만 사법부 대응은 뜻밖이었다. ‘(원 전 원장에 대한) 상고심 판단이 남아 있고 BH(청와대)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지고 있는 국면. 발상을 전환하면 이제 대법원이 이니셔티브(주도권)를 쥘 수도 있음.’ 재판을 이용해 청와대와 ‘거래’를 하자는 발상이었다. 이후 양승태 대법원은 전원합의체에 원 전 원장 사건을 회부했고, 결과는 대법관 13 대 0 전원일치 파기환송이었다. 우 수석의 요구와 일치했다.

엊그제 대법관들이 집단 성명을 냈다. 사상 초유의 일이다. “재판에 관해 사법부 내·외부 누구로부터 어떠한 연락도 받은 사실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신뢰를 상실한 사법부는 재판 기술자 집단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사법부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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