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없는 만남이 우선이다

2018.03.07 20:46 입력 2018.03.07 20:55 수정

[기자칼럼]조건 없는 만남이 우선이다

6일 오전 ‘단결투쟁’이라고 적힌 머리띠를 두른 한국지엠 노조원들이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앞에 섰다. 이들은 군산 공장 폐쇄 철회와 노조의 경영실사 참여 등을 요구하는 대정부 성명을 발표하고 무기한 1인 시위에 들어갔다. 기자회견을 끝낸 이들은 채권단인 산업은행 이동걸 회장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보름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더블스타로의 매각설이 전해진 지난달 말. 금호타이어 노조는 이 회장 앞으로 ‘산은 회장 면담 요청’ 공문을 발송했다. 노조는 “진위를 알려달라”며 면담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금호타이어 노조는 채권단이 중국 더블스타로의 해외매각 협상을 공식화한 지난 2일부터 줄곧 면담을 요청하고 있지만 이 회장은 응하지 않고 있다. 취임 후 노조를 찾아 “고통분담이 절실하다”고 설득하던 이 회장은 어디로 간 것일까? 기습적인 공장 폐쇄에 이어 노골적인 추가 철수 압박까지 받고 있는 한국지엠, 법정관리가 코앞인데도 가장 기본적인 자구안조차 공회전하고 있는 금호타이어. 한 치만 삐끗해도 자칫 대량실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조정 현안이 동시에 굴러가면서 채권단이 동분서주하고 있다. 본사와 노조, 채권단에 정부까지 얽히고설킨 복잡한 현안들이지만, 그중에서도 채권단이 한목소리로 주장해온 내용이 있으니 바로 노조의 협조다. 고통분담을 위한 한국지엠의 임단협, 구조조정을 위한 금호타이어의 자구안이 그것들로 채권단은 경영정상화를 위한 첫 번째 퍼즐이 바로 이들 노조의 고통분담이라고 누누이 강조해 왔다.

그런데 뭔가 묘하다. 첫 번째 퍼즐이라던 노조와 채권단 사이에 기본적인 대화 채널조차 유지되고 있지 않다. 노사협상이 노조와 경영진 간의 협상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얘기지만, 대량실업이라는 국가적 비상사태를 목전에 둔 국책은행이 원칙부터 찾는다면 그것도 모양새가 좀 이상하다. 더군다나 금호타이어는 사실상 채권단이 주인인 회사다.

채권단은 열심히 일하고 있다. 산은에 따르면 인수 후보군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가능성을 타진하는가 하면, 회생의 최고 조건을 찾기 위한 실사와 시뮬레이션을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이 회장도 달리고 있다. GM 본사 경영진을 만나 논의하는 실무부터 국회에 출석해 설득하는 정무적 대응까지 수행하고 있다. 채권단과 이 회장의 부재는 노조와의 소통이라는 지점에서만 두드러진다.

해외매각과 관련해 사실상 결정권자인 채권단이 노조 설득에 뒷짐만 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산은은 “이제부터 노·사·채권단의 3자대면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금호타이어 노조는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 회장이 노조와 직접 만나는 것과 관련해서도 산은은 “회장도 언제든지 노조와 대화할 것”이라고 했지만, “여건이 마련되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면서 “자구안 합의라는 최소한의 조건도 안됐는데 회장이 숫자 가지고 왔다 갔다 얘기를 할 수 없지 않으냐”고 덧붙였다. 자잘한 협상이 마무리되면 ‘회장님’이 등장해 굵직한 현안에 결단을 내려줄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이런 태도는 회장을 램프의 요정으로 만드는 착시를 가져온다. 회장과 담판만 지으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잘못된 판단을 노조에 심어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생업, 직장이 걸린 악몽을 겪고 있는 노동자들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구, 원칙적으로 불합리한 요구를 제시할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회장이 가급적 빨리 나서서 되는 것과 안되는 것 사이에 확실한 선을 그어주는 게 낫다.

채권단 말마따나 한시가 급한데 “여건이 마련되기”를 기다리겠다는 건 사치스럽게 들린다. 머리 위에서 핵실험을 해대는 북한과도 ‘조건 없이’ 마주앉아 대화부터 하자는 게 현 정부가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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