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를 그대 품 안에

2018.12.31 20:31 입력 2018.12.31 20:33 수정

기해년이 밝았다. 노란돼지(己亥)의 해라니, 제일 좋아하는 돼지 이야기를 하나 풀어놓을까 한다. 에코 페미니스트인 마리아 미즈가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라는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어머니와 암퇘지”라는 일화다.

[직설]돼지를 그대 품 안에

1945년 초,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농부의 딸이었던 미즈는 독일 아이펠의 서쪽 마을에 살고 있었다. 당시 마을은 먹을 것과 온정을 구걸하는 독일 패잔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 저녁 수프를 끓이고 감자를 삶아 그들을 거둬 먹였다. 미즈의 다섯 오빠는 모두 집을 떠나 참전 중이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마을 사람들은 좌절했다.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씨를 뿌리지 않았고, 집마다 암소와 돼지는 전부 도살당했다.

모두가 무기력하게 종전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미즈의 어머니는 암퇘지 한 마리를 이웃 마을의 수퇘지에게 데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어차피 다 망하게 생긴 마당에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어머니를 비웃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비웃음에 이렇게 답했다. “삶은 지속된다.”

5월이 되자 영원할 것만 같았던 전쟁이 끝났다. 다섯 오빠는 집으로 돌아왔고, 미즈네 암퇘지는 열두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마을에 살아남은 유일한 새끼 돼지들이었다. 어머니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다섯 아들과 가족을 위해 새끼 돼지를 생필품과 맞바꾸었다.

이야기의 끝에 미즈는 이렇게 질문한다. “그렇게 삶은 계속되었지만, 과연 이 삶이 저절로 계속된 것이었을까?” 이어서 덧붙인다. “어머니는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신이 알아서 해줄 것이라며 기도만 하고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행동해야 하고, 항상 자연과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삶을 지속하기를 원한다면 삶에 대한 책임도 같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와 여성들은 일상생활의 책임을 어깨에 짊어져왔다.”

기대와 희망이 무너져 내린 광장의 폐허를 돌아보며 세상이 망했다고 한탄하면서 시류에 떠밀려가는 것은 언제나 쉽다. 무엇보다 어렵지만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일은 당장에 잡아먹어도 부족할 돼지를 부득부득 먹이고 키워내는 일이다. 전쟁 같았던 2018년을 마무리하고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이는 2019년을 맞이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삶을 위해 돼지를 키우는 그 마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모두가 파국을 말하는 시대, 아니 파국과 리셋을 오히려 꿈꾸는 시대에 우리는 “대안은 없다”는 체념에 빠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바꾸어나갈 다른 방식을 준비해야 한다. 이미 경험에서 배운 것처럼 파국은 공평하게 닥쳐오지 않고, 리셋은 가진 자에게 더 유리할 뿐이므로.

미즈는 위의 책에서 자본주의의 상품순환 구조 외부에서 지속하는 ‘자급의 삶’을 대안으로 제안했다. 욕심 내지 않고 자연이 허락한 만큼 거두면서, 직접 키우고 나눠 먹는 삶. 나는 좀 더 다양한 대안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미즈가 말하는 ‘돼지’를 “우리의 삶을 바꾸는 새로운 상상력과 구체적인 실천”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이유다. 그리고 ‘돼지’를 품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과연 잘 살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본 <어른이 되면>(2018)은 무거운 질문과 설레는 희망을 함께 준 다큐멘터리였다.

이 작품은 장혜영, 장혜정씨 자매가 함께 살아가는 ‘일상’을 따라간다. 장애를 이유로 17년 동안 시설에서 지냈던 혜정씨와 함께 살기 위해 언니 혜영씨는 돈을 벌고, 집을 구하고, 장애에 대해 공부하고, 가족을 설득하고, 자신의 동료들이 혜정씨와 익숙해질 시간을 만들었다. 물론 시설 밖이 낯설었던 혜정씨 본인이 탈시설을 결정하는 데까지만도 1년의 시간이 걸렸다. 혜영씨만큼이나 혜정씨도 다른 것을 꿈꾸고 실천할 준비가 필요했던 셈이다. 그리고 그의 시설 밖 일상이 스크린과 SNS에 등장하자, 이 사회에는 또 다른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상은 그렇게 바뀌어 간다.

2019년 노란돼지의 해. 누구나 하나쯤, 자신만의 돼지를 가슴에 품는 시간이 열리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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