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클래식 작곡가들을 위하여

2019.02.06 20:19 입력 2019.02.06 20:26 수정

12년 전 예술학교에서 ‘한국 작곡가와 작품’이라는 수업을 개설한 적이 있다. 당시 연구재단의 ‘보호학문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예외적으로 한 학기만 열린 수업이었다.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알고 있는 한국 작곡가의 이름을 물었더니 대답이 신통찮았다. 윤이상이나 진은숙은 그나마 관심 있는 일부의 답변이었고, 학교에 재직 중인 작곡과 교수의 이름 정도가 거론되었을 뿐, 홍난파나 안익태조차 그들에게는 낯설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전공했다 해도 자신이 연주하는 고전 작곡가들 외에 창작음악을 접할 길이 별로 없으니 놀랄 일도 아니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문화와 삶]한국의 클래식 작곡가들을 위하여

한반도에 ‘작곡가’라는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건 서양음악이 유입된 이후다. 판소리 작창이나 산조 유파 창시자를 ‘작곡가’라 칭하지 않는 건 이 단어가 서양에서 들어온 번역어여서기도 하지만, 음악 창작의 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군악대나 개화기 창가, 선교사들이 전파한 찬송가 등을 통해 서양식 음조와 악기들이 퍼져나가며, 1920년대부터는 서양식 곡조에 우리말을 얹은 노래들이 작곡되어 불렸고 유성기 음반을 통해서도 널리 유포되었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서양음악을 접한 한국의 첫 세대 작곡가들은 ‘봉선화’(홍난파), ‘고향생각’(현제명), ‘가고파’(김동진) 같은 가곡으로 이름을 알렸다.

해방 이후에야 음악대학이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작곡가들이 배출되었고, 1960년대 전사회적인 근대화와 모더니즘의 흐름에서 현대적 감성의 음악이 작곡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나온 백병동의 ‘운’, 강석희의 ‘부루’, 황병기의 ‘미궁’, 김정길의 ‘추초문’, 1980년대 강준일의 사물놀이 협주곡 ‘마당’, 이건용의 ‘만수산 드렁칡’ 등은 서양음악을 체득한 한국 작곡가들이 이 땅에서 빚어낸 창작물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작곡계는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고, 대학과 협회의 활동도 공고해졌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클래식 작곡가들의 활동 기반은 취약하다. 신자유주의 시대 순수예술 전반이 처한 어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이 창작되고 향유되는 대중음악과 달리, 클래식 분야에선 그야말로 ‘고전’ 레퍼토리가 압도적이다. 현대 작곡가들은 바흐부터 스트라빈스키까지 수백년간 축적된 걸작들과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반세기가 조금 지난 국내 창작음악의 역사에서 우리 작곡가들에겐 대결할 만한 예술적 상대도 빈약하고, 새로운 작품을 위촉하고 연주하는 문화도 척박하다. 그러다보니 창작곡 연주는 개인이나 협회의 행사로 명맥을 이어가는 상황이다. 신작 연주에 적극적인 음악가나 단체들이 늘고 있지만, 작가로 주목받는 클래식 작곡가는 드물다.

일반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분야라 할지라도,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수많은 주제들을 음향적 상상력으로 포착해 구현하는 이들이 작곡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잊은 채 작곡가들은 각자의 세계에 고립돼 자폐적인 상아탑에 기거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작곡가로서의 생존이 대학조직에서나 가능한 조건에서 작곡가와 작곡과 교수는 엄연히 다른 직업이 돼버렸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받으며 작품을 의뢰받고 그 곡들이 꾸준히 연주되는 문화, 비평적 담론이 활발히 전개되는 창작음악 생태계가 절실하다. 몇 년 전부터 발행되는 반연간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은 한국 창작음악의 현장을 기록하고 그 의미를 해석해 작곡가들의 문제의식을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려는 시도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과거의 관습과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음악 콘텐츠를 창작하고 공유하는 플랫폼을 마련하는 것도 과제다. 열악하기 그지없는 상황일지라도 세상의 문제들에 감각을 열어놓고 인디 음악가의 절박함으로 자신의 예술적 고민을 쏟아내는 작곡가가 존재하는 한, 오늘날 창작음악의 현장은 훗날 이 시대를 소리로 기억하는 의미 있는 한 장면이 될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주자들이 배출된다 한들, 우리 시대의 모습을 담아내는 작곡가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한국 작곡가들의 분투를 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