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성 선수가 연 ‘판도라의 상자’

2019.05.06 20:41 입력 2019.05.06 20:42 수정

운동선수만큼 남녀 구별이 엄격한 직업도 드물다. 남성은 남성들과, 여성은 여성들과 겨뤄야 한다. 남녀 혼합팀을 구성하는 종목이 있지만 이때도 성비를 맞춰야 한다. 동일한 성끼리 겨루도록 하는 게 공정한 경쟁의 장을 조성하는 일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기자칼럼]간성 선수가 연 ‘판도라의 상자’

이런 스포츠계에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한몸에 지닌 간성(間性) 선수, 캐스터 세메냐가 등장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중장거리 육상 스타 세메냐는 2009년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800m 금메달을 차지하며 국제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러나 일부 국가에서 ‘외모가 남자 같다’며 세메냐의 성별에 의문을 제기했다. 검사 결과 세메냐는 간성인 것으로 확인됐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간성 규모에 대한 추정은 학자마다 다르다. 전체 인구의 1.7%라고 추정한 연구가 있는 반면 0.018%로 추산한 학자도 있다. 확실한 것은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형태는 다양하다. 외부 생식기관의 모양새는 남성이지만 난소가 있거나, 외형은 여성이지만 잠복 고환을 가지고 있는 식이다. 겉보기엔 여성인데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은 경우도 해당된다.

국제육상연맹(IAAF)은 세메냐의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지나치게 높은 것을 문제 삼고 있다. 테스토스테론이 운동 능력에 영향을 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해 IAAF는 세메냐를 겨냥해 ‘정상적인’ 여성의 테스토스테론 수치는 혈액 1ℓ당 2나노몰 이하이며, 대회 전 6개월 동안 약물 투약을 통해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5나노몰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는 규정을 신설했다.

세메냐와 남아공육상연맹은 이 규정이 차별이라며 스포츠중재재판소에 제소했지만 지난 1일 재판소는 IAAF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소는 여성 선수들의 통합을 위해 “이런 차별은 필요하고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국제대회에 출전하려면 세메냐는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 도핑 아닌 도핑을 해야 하는 셈이다.

타고난 신체 조건이 탁월한 선수들이 있다. 사실 위대한 선수들은 대부분 그렇다. 세계 수영을 제패했던 미국의 마이클 펠프스는 발목에 관절이 하나 더 있었고 운동 후 젖산 수치가 남들의 절반에 불과해 피로를 덜 느꼈다. 하지만 누구도 펠프스에게 ‘약물을 복용해 젖산 수치를 높여라’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특이성을 재능으로 여기고 경이롭게 바라봤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모니카 헤스는 “펠프스의 유전적 차이는 찬양하면서 왜 세메냐의 유전적 차이는 처벌하느냐”고 지적했다.

운동선수의 신체 조건 중 어디까지가 타고난 재능이고 어디부터가 규제해야 하는 속임수일까. 이 경계를 명확히 나눈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IAAF 규정은 낯설고 두려운 소수자를 배제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 아닐까. IAAF는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규정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낮추기 위해 주삿바늘을 꽂든지, 그게 싫으면 선수 생활을 그만두라고 강요하는 일은 전혀 공정하지 않다. 외관상 남성처럼 보이는 여성 선수를 지목해 성호르몬 검사를 실시하는 게 반인권적임은 말할 것도 없다.

유엔인권이사회는 IAAF 규정에 대해 “불필요하고 모욕적이며 유해하다”는 논평을 내놨다. 세계의사회는 약물로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낮추는 일은 비윤리적이므로 IAAF 규정을 집행하지 말라고 의사들에게 당부했다.

세메냐는 약물 투약을 거부하고 IAAF에 맞서 싸우겠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IAAF 규정에 대한 스포츠중재재판소의 결정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고 전했다. 간성 선수에 대한 논의가 다른 종목으로 조심스레 확산되리라는 전망이다. 현명한 해법이 필요하다. 꿈과 희망, 인간승리의 드라마여야 할 스포츠가 차별과 배제의 가해자가 된다면 선수와 팬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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