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닮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2019.08.07 21:06 입력 2019.08.07 21:50 수정

최근에 큰 규모의 강연을 기획하면서 업체-작가 사이에서 한 달 넘게 서로의 일정과 내용을 조율한 일이 있다. 대학원생 조교 시절에 학회라든가 세미나라든가 하는 것들의 실무를 담당해 보기는 했지만 이러한 사회적 경험은 사실 처음이었다. 업체에서는 이런저런 요청을, 사실은 요구라고 할 만한 것을 계속해 왔다. 섭외한 작가들은 대개는 내가 알고 있거나, 글을 좋아하고 존경하거나, 이것을 핑계로 꼭 연락해 보고 싶었거나 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해 차마 연락을 하지 못하고 어떻게 해 보려다가 상황이 악화되는 그러한 일이 반복되었다.

[직설]글과 닮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불쾌감을 표시하며 빠지겠다고 선언한 작가도 있었다. 몹시 미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나의 실수로 관계가 단절되는 게 아닐까 싶어서 한동안 아무 일을 하지 못했다. 아마 내가 그였다고 해도 ‘이건 많이 무례한 일이잖아요’라는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몇몇 작가들은 다른 의미로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오히려 자신은 아무래도 괜찮다며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무척 바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며칠을 앞두고 강연 내용이나 일정이 변경되는 것은 그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괜찮다고 말했다. 내가 요청하는 여러 서류들도 자신의 시간을 내어 빠르게 보내주었다.

특히 나와 나이가 비슷한 모 시인은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내왔다. “기업과 일하는 무게에 시인과 일하는 무게를 함께 얹어 죄송합니다”라는 것이었다. 이건 마치, 그가 쓰고 있는 시와 같았다. 덕분에 나는 그 문구를 붙잡고 당시의 짓눌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말로 일주일쯤은 힘들 때마다 그 문자를 열어보았던 것 같다. 강연이 취소되었음을 알리는 나에게 “괜찮아요,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에요”라거나 “요즘 강연을 줄여가고 있는데 오히려 좋은 소식이네요”라고 답한 작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기초로 타인의 처지를 사유할 줄 알았고, 자신을 단단하게 지켜내면서 타인의 삶을 보듬어 낼 줄을 알았다. 이것은 정말로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이다.

나에게도 강연을 요청하는 연락들이 종종 온다. 학교, 도서관, 여러 시설, 기업, 독서모임 등이다. 수십 명의 독자들과 만나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그 담당자들과 몇 번의 연락을 주고받게 된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들이 요청하는 강사카드라든가 강의계획서라든가 강의자료라든가 하는 것들을 종종 빼먹곤 했다. 분명히 일정에 기록해 두기는 하는데 꼭 한두 개씩 잊게 되기도 하고, 그러면 “정말 죄송하지만 혹시 언제 답신을 주실 수 있을까요”하는 메일을 받고서야 “오늘까지 보내겠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답하는 것이다. 내가 그 입장이 되어 보니 요청한 것을 받지 못하면서도 ‘죄송’의 수사를 사용해야 하는 그 심정이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이제야 이해가 된다. 나처럼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은 그 처지가 되어보고서야 자신을 기초로 누군가를 상상해내게 된다. 항상 누군가에게 상처와 번거로움을 전하고서야 조금씩 배워가는 것 같아 그저 죄송할 뿐이다.

며칠 전 모 주간지에서 원고를 요청하고는 3주 동안 3번에 걸쳐 지연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담당 기자께서 “양치기 소년이 되어 죄송합니다”라는 문자를 보내오셔서, 그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나 싶어서 “담당자만큼 마음 힘든 사람이 어디 있나요. 무게를 덜어드려야 하는데 원고라도 제때 보내겠습니다”하고 답신을 보냈다. 물론 그 시인의 문자를 표절한 것이다. 평소였다면 “네 알겠습니다”하고 답하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내가 더욱 사랑하게 된 몇몇 작가들은, 결국 자신의 글과 삶을 일치시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글을 닮은 언어와 행동을 타인에게 보낼 줄을 알았다. 아마 그들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제대로 잘살고 있는지 별로 자신이 없는 나는 글로써라도 나의 삶을 견인해 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겠다. 글과 닮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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