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에 대하여

2019.08.12 20:40 입력 2019.08.12 20:42 수정

윤정주.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소장. 20년을 한 단체에서 일하면서 여성 등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싸워 온 사람. 2019년 8월8일. 그는 최선을 다했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동료들은 그가 “위대한 활동가”였다고 말한다.

[직설]품격에 대하여

그런데 다음날, 조용하게 추모의 마음이 흐르던 온라인 공간에 고인의 생전 활동을 폄하하는 문장이 하나 올라왔다. 방송인이자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정렬씨가 자신의 개인 트위터 계정에 쓴 글이었다.

“사유가 본인 상인 점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윤정주 위원이 방통위원직에서 빠진 건 참 다행이다.” 이렇게 쓴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그는 “(윤 위원은) 이재명 지지자다”라고 답했다.

이정렬씨는 2018년 8월 방송된 TBS TV <품격시대>에서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비하하는 은어인 “찢묻었다”를 사용한 것으로 문제가 되었다. 이에 민원이 제기되자 방송통신심위위원회에서는 징계를 결정한다. 이 심의회의에 윤정주 소장이 심의위원으로 참여했다. 이씨가 윤 소장을 ‘이재명 지지자’라고 단언하고 비난한 이유다.

그런데 당시 방심위 회의록을 살펴보면 이씨의 해석은 과도하다. 윤 소장은 민원이 제기된 “찢묻었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여성의 성기를 찢어서 묻는다는 말에서 나온 표현”으로 이런 단어가 공영방송에서 사용되면 안된다는 것.

여느 인터넷 용어와 마찬가지로 “찢묻었다”라는 말의 어원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터다. 하지만 대체로 “이 지사와 그의 형 사이에 있었던 욕설 공방 중 이 지사가 “형수의 X지를 찢어 묻어버리겠다”는 욕설을 퍼부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문제의 용어는 이로부터 비롯된 별명이라고들 설명한다. 이후로 “찢=지지=더럽다”로 전유되었고, “찢묻었다=더러운 것이 묻었다=이재명 지지자다” 정도의 의미로 유통되고 있다.

이렇게 여성에 대한 성적 폭언에 근간한 은어를 비판하는 것은 지금까지 윤 소장이 해 온 활동과 크게 어긋남이 없는 판단이다. 그의 심의위원 활동은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치적 판단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여기에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 여부는 개입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윤 소장의 ‘편향성’이 아니라 오히려 이씨의 편협한 문해력이다. 궁찾사(혜경궁김씨를찾는사람들) 법률 대리인 활동을 하면서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갈등을 빚어 온 그는 자신에 대한 방심위의 판단조차 진영 논리 안에서밖에 해석할 줄 몰랐던 셈이다.

이씨는 자신의 트윗이 문제가 되자 또다시 “윤 위원은 방심위원으로 일할 때 이재명 지사가 관련되어 있으면 편파적인 결정을 해 왔다”고 부연(혹은 변명)했다. 여전히 그 판단 근거는 밝히지 않은 상태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그러게 생전에 잘 살았어야지”라며 다시 또 윤 소장을 깎아내린다. ‘품격시대’는커녕, 저열한 말의 칼춤이 트위터를 타고 흐르는 중이다.

고인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시간. 동료들과 유가족은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고인이 활동하던 공간들을 방문했다. “꼭 방심위에도 들려 달라”는 방심위 직원들의 부탁에 그곳 사무실과 회의실에도 들렀다. 그가 앉던 회의실 책상에는 추모의 꽃이 준비되어 있었다.

윤정주 소장은 지난 1년6개월 동안 1600건에 달하는 심의 안건을 받아 3520회의 안건 심의 기록을 남겼고, 여성과 소수자 문제와 관련해 페미니스트 심의위원으로서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해왔다. 덕분에 부당한 공격에 시달려야 했음은 물론이다. 또한 이런 과중한 업무 속에서도 방심위 내 양성평등관 역할을 수행했고, 직원들의 고충처리와 젠더문제 상담을 맡았으며, 관련된 문제 해결을 위해 힘썼다고 한다. 직원들이 꽃을 준비했던 마음을 알 것 같다.

품격이란 그런 것이다. 함부로 떠드는 입, 쉽게 놀리는 손가락이 아니라, 그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존재의 품격을 결정한다.

윤정주 소장님. 고생하셨습니다. 당신 덕분에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은 더 나은 세계입니다. 남기신 뜻은 우리가 이어가겠습니다. 부디 편안히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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