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노동자 이흥섭

2019.08.11 20:35 입력 2019.08.11 20:37 수정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이것은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반도체가 아니라 소년이다. 소년의 나이는 열일곱.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밑으로 어린 동생이 둘 있었다. 그날은 아버지와 콩밭을 매고 있었다. “마을 이장과 면사무소에서 나온 사람, 그리고 다른 네 명 정도가 밭에 있는 우리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마을 이장이 아무 말 없이 노란색 봉투를 아버지에게 건넸습니다.”

[고병권의 묵묵]강제징용 노동자 이흥섭

훗날 소년이 담담히 구술한 그날은 너무 평온해 더 슬프다. 사람들은 봉투만 전달하고 돌아갔고 아버지는 점심이나 먹자며 소년의 손을 잡고 집으로 왔다. 그러고는 옷장을 열어 하얀 목면 양복을 입히고는 말없이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겼다. 결국에 밥은 먹지도 못했다. 급히 차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소년도 아버지에게 봉투에 대해 묻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알고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강제징용이었다.

황해도 곡산에서 콩밭을 매던 소년은 그렇게 일본 규슈의 탄광에 끌려갔다. 그러고는 속옷 한 장만을 걸친 채 지하 채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합숙소의 취침종이 울린 후 소년은 방울 맺힌 눈으로 천장을 보며 말하곤 했다. “전쟁이 싫습니다. 탄광도 싫습니다. 죽는 것도 싫습니다. 식민지도 싫습니다.”

며칠이 지났을 때 사무실에 불려간 소년은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너는 비국민이다!” 바닥에는 대역죄의 증거인 양 보따리가 풀어헤쳐져 있었다. 아버지가 쌀가루 봉투 안에 어머니의 유품인 반지를 넣어준 모양이다. 직원은 이런 물건을 공출하지 않고 감추었다며 소리를 질러대고는 소년의 서류에 ‘비국민’이라는 표시를 해두었다.

‘비국민’은 참으로 괴상한 말이다. 그것은 타국민이 아니다. 국민이면서 국민이 아닌 사람, 다시 말해 국민 자격이 없는 국민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었다. 우선은 조선인에게 딱 들어맞았다. 당시 조선인은 한편으로 일본에 충성을 다해야 하는 일본 국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인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식민지인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일부 일본인들에게도 사용되었다. 전쟁 중인 나라에 충성을 보이지 않는 일본인들 말이다.

1945년 1월1일, 소년은 탄광을 탈출한다. 일본 국민도 아닌데 일본의 전쟁에 헌신하며 죽어갈 생각이 없었다. 일본의 비국민들이 그의 탈출을 도왔다. “그 시대는 그곳이 탄광이든 어디든 자기가 데리고 있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도망자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고 감옥에 들어가는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의 전쟁에 협력하지 않는 일본인들, 더 나아가 그런 일본이라면 일본인이기를 그만두겠다는 일본인들이 있었다.

소년은 부지런히 도망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8월15일 정오에 ‘옥음방송’이라는 걸 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방송이 끝난 후 칼을 찬 군인이 단상에 올라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희들은 자유다! 대일본제국은 지금 막 그것을 허락한 것이다! 앞으로 너희들의 행동에 절대로 관여하지 않겠다! 이상!”

소년은 이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처음에는 자유라는 말에 만세를 불렀다. 더 이상 도망 다닐 필요가 없었으므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므로. 그리고 할아버지, 아버지, 자신까지 이어지던 민족적 속박이 풀렸으므로.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소년은 이후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말이 그다음 말이었다는 것을 절감한다. 대일본제국은 앞으로 너희들의 일에 절대로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 말이다.

일본은 항복했고 전승국들과의 협약에 따라 식민지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잃었다. “옥음방송을 듣기 전까지 자네들은 일본의 명령에 따라야 했지만 옥음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자네들과 일본과의 관계는 완전히 없어진 거라네.” 정말로 무책임한 말이었다. “우리는 원해서 징용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대일본제국의 필요에 의해 끌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징용인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지 않았다. 강제징용을 자행했듯 방치를 자행한 것이다.

다음날부터 하카타항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수백명씩 싣는 배로는 귀향에만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항구에 나앉은 조선인들의 생계를 돌보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수십만명이 귀향했지만 또한 수십만명이 그대로 남았다. 소년도 귀향하지 못한 채로 거기 남았다.

소년은 그로부터 70년 가까이를 살았지만 그의 삶은 1945년 8월의 하카타항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았다. 늙은 소년의 구술은 거기서 멈추어버렸다(이흥섭, <딸이 전하는 아버지의 역사>, 논형). 일본과 한국, 미쓰비시와 삼성은 미래로, 세계로 달려갔지만 소년은 70년을 그 자리에 있었다. 아마 귀향했어도 처지가 바뀌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처럼 징용에 끌려갔다가 귀향했던 청년 이춘식은 98세가 되어서야 한국 대법원에서 피해 보상 판결을 받았는데 그러고도 “나 때문에 국민들이 고생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을 뱉어야 했으므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삼성을 지키고 일본은 미쓰비시를 지키는데, 불화수소보다 적게 남은 소년들의 이야기는 누가 지키는 것일까. 우리의 기억소자에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했던 비국민들의 이야기가 저장되어 있기는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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