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등급이 아닌 장애인별 맞춤 서비스다

2019.07.14 20:36 입력 2019.07.14 20:38 수정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7월1일, 서초동에서 잠수교를 거쳐 서울역까지 행진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풍선이 들려 있었다. 몇 사람이나 알아보았을까. 그것은 개선 행렬이었다. 지난 30여년의 싸움을 이겨낸 사람들. 1988년 11월부터 실시된 장애등급제가 마침내 폐지되었다. 이날 한 운동가는 한국 장애인 운동의 역사는 7월1일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했다. 7월1일은 그만큼 중요한 날이다.

[고병권의 묵묵]문제는 등급이 아닌 장애인별 맞춤 서비스다

하지만 그날의 행렬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장애인을 보지는 못했다.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해 무려 1842일의 농성도 불사했던 사람들인데 어깨를 들썩이기는커녕 토닥이는 말들이 많았다. ‘그래도 우리가 조금은 해낸 거야.’ 행진은 저녁 무렵 끝났다. 서울역 광장에서 몇몇은 승리를 자축하겠다며 소리를 질렀고 몇몇은 악대를 따라다니며 어설프게나마 춤을 추었다. 그러나 곧이어 모두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날 밤 사회보장위원회 건물 앞에서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를 요구하는 1박2일의 노숙 농성에 들어갈 참이었다. 경찰이 도로 한 편에 내어준 통로를 따라, 7월1일 이후에도 여전한 밤길을 전진하는 휠체어 행렬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7월1일이 7월1일 같지가 않았다.

그동안 장애인들에게는 6개의 등급이 있었다. 팔을 잃으면 1등급, 손가락을 잃으면 2등급, 앉지 못하면 1등급, 앉기는 하는데 10분을 못 버티면 2등급, 지능지수가 34 이하면 1등급, 49 이하면 2등급. 그런 식이었다. 장애인 개인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활동을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지, 국가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장애인을 저울대에 올려놓고 팔다리는 있는지, 옷은 혼자서 갈아입는지, 말은 알아듣는지, 그저 눈금만을 기록해왔을 뿐이다. 장애인은 불편하지만 장애인 관리는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었다.

이런 등급제를 폐지하는 데 천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요구의 핵심이 지극히 단순하고 명료하기 때문이다. 저울대에 올린 고기마냥 등급을 나누지 말고 장애인 각자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라는 것. 그런데 등급제 폐지에 천재들이 개입한 것 같다. 등급 분류는 중증과 경증으로 단순화되었는데 ‘종합조사표’라고 하는 복잡한 점수표가 생겨났다.

종합조사표에 따라 장애인들은 저마다 수능점수 같은 점수를 받는다. 사회활동과 가구 환경도 고려하지만 각자의 장애에서 파생한 기능 제한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596점 만점에 532점). 이를테면 혼자서 옷을 갈아입을 수 없으면 24점을 받는다. 그러나 보고 듣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총점에서 36점이 깎인다. 공격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다시 8점이 깎이고, 약간이나마 주의력을 갖추었다면 20점 중에서 10점 정도는 사라진다.

그런데 종일 누워 지내야 하는 최중증 지체장애인이라고 해도 현재의 서비스 등급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인지행동에 문제가 없으면 특정 과목을 응시하지 않은 학생처럼 8개 항목 94점이 모두 날아간다. 거기에 보고 듣기까지 가능하면 36점이 추가로 사라진다. 이렇게 잃은 130점은 한 달 최대로 받을 수 있는 활동지원서비스 시간에서 120시간을 잃었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월 120시간의 삶이 사라지는 것이다.

종합조사표를 만든 천재들은 6등급의 흉측한 막대그래프를 없앤 대신 개인별 점수를 이용해서 아름다운 정규분포 곡선을 얻었다. 서비스 총량은 별로 늘지 않았는데 왼쪽 지체장애인한테 빼낸 시간을 오른쪽 발달장애인한테 채워 넣으니 균형 잡힌 통계 곡선이 생겨났다. 장애등급제 폐지로 이제야 수학적으로 무언가 바로잡힌 세상이 도래한 건가.

그런데 등급제를 폐지하고 개인별 맞춤 서비스를 실시하라는 단순한 요구에 왜 이렇게 천재적인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당신에게 무슨 서비스가 얼마나 필요합니까. 이런 물음 하나 던지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장애인의 손상을 등급으로 평가하는 대신 장애인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묻고 조사하고 개발하자는 게 그렇게 이상한 말인가. 예산 문제로 당장 시행이 어렵다면 일단 욕구와 필요를 조사하고 목표를 세워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역시 내가 바보인가.

하지만 세상엔 이런 나라도 있다고 한다. 스웨덴에서는 시민이 활동서비스 지원을 신청하면 공무원이 당사자를 만나 상황을 확인한 뒤 서비스 제공량을 확정해준다. 발달장애인처럼 특별한 손상을 가진 시민들에게는 의사결정 조언, 야외활동 동행, 친구 서비스, 함께 머물러 주기 등등 별도의 열 가지 서비스가 지원된다. 인상적인 것은 달랑 두 장 자리 신청서다. 항목도 단순하다. 이름과 주소를 적고 필요한 서비스를 적으면 그만이다. 그러면 공무원이 방문하고 이야기를 나눈 뒤 내용을 확인하고 서비스를 제공한다.

여기에는 장애인에 관한 정규 분포 곡선 같은 건 없다. 누군가를 장애인으로 규정해서 통계를 작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장애를 겪는 시민들이 있을 뿐이다. 서비스는 온갖 기능별 점수를 더한 뒤 종합 고득점자에게 제공되는 게 아니라 해당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제공된다. 나는 바보라서 그런지 이런 게 진짜 장애등급제 폐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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