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사연 사라진 극, 범죄 보도 노하우 읽기

2019.10.03 20:34 입력 2019.10.03 20:39 수정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한 장면.  넷플릭스 홈페이지 갈무리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한 장면. 넷플릭스 홈페이지 갈무리

1979년 5월9일, 미국 플로리다주 제2재판구 데이드 카운티 순회 법원에서 사상 유례없는 재판 중계가 시작됐다. 피의자는 플로리다주립대에서 여학생 2명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시어도어 로버트 번디. 테드 번디로 더 잘 알려진 그는 또 다른 36건의 살인에 대해서도 심문을 받는 중이었다. 재판이 열리기 전부터 테드 번디에게 쏠린 대중적 관심은 엄청났다. 젊은 여성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범행 방식, 로스쿨에 다녔던 경력, 미남형 외모 등 테드 번디에 관련된 모든 요소가 언론의 눈길을 끌었고, 그는 이미 셀러브리티가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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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유의 법정 중계가 결정된 테드 번디의 재판에는 미국 50개주와 세계 9개국에서 대규모 취재진이 몰려들어 그의 유명세를 입증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테드 번디는 국선 변호사를 제치고 직접 수석 변호사의 역할을 맡는 쇼맨십을 발휘한다. 범죄 현장 목격자를 반대 신문하면서는, 형사가 시신의 훼손 상태를 상세하게 묘사하도록 유도하기까지 했다. 테드 번디가 자신의 범죄를 부정하고 살인 행위를 즐기듯 복기하면서 재판을 희대의 볼거리로 만드는 동안, 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데 여념이 없었던 언론은 그의 가장 큰 동조자였다.

과거처럼 복수, 분노 등의 동기가 아니라 쾌락만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범죄자들이 활개를 치던 1970년대, 테드 번디의 재판쇼는 이 새로운 유형의 범죄를 신중하게 들여다보기도 전에 강력범죄에 관한 선정적이고 오락적인 재현의 틀을 제공했다.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관심은 살인범들에게 쏠린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살인자들의 잔혹성을 증명하는 기록적 수치 안으로 사라지는 데 비해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는 범죄 동기와 수법, 가정환경, 성장 과정 등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 조명받는다. 그 과정에서 연쇄살인범들은 ‘샘의 아들’ ‘조디악 킬러’ ‘그린 리버 킬러’ 등 거창한 수식어와 함께 캐릭터처럼 소비되고, 이는 다시 영화, 드라마 등의 범죄 재현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일례로 ‘연쇄살인의 귀공자’로 불린 테드 번디는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 베이트만과 같은 지적인 살인마 캐릭터의 모티브가 됐다.

그런데 최근 강력범죄 재현의 유구한 관습을 완전히 뒤엎은 작품이 등장해 화제가 되고 있다.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2008년,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일어난 강간사건의 피해자가 무고죄로 기소된 실화를 다룬 이 작품은 강력범죄를 다룰 때 기존의 대중미디어가 간과하는 점이 무엇이고, 조명해야 할 점이 무엇인가를 냉철하게 되짚는다. 가장 두드러지는 미덕은 가해자 위주의 서사를 철저히 피해간다는 데 있다. 극중 악당은 형사들의 수사망을 피해가며 수많은 여성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연쇄강간범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를 악마나 괴물로 신비화하는 대신, 꼭 잡아서 죄의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하는 “수많은 흉악범” 중 하나로 묘사한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형사들을 따돌릴 수 있었던 것도 특별히 지능적이거나 특출 나서라기보다는, 성차별적인 사회의 모순으로 인한 결과로 설명하고 있다. 끈질긴 추적 끝에 드디어 붙잡힌 범인이, 카메라 앞에서 말 그대로 ‘발가벗겨지는’ 장면은 그가 악마 따위가 아니라 그저 추하고 초라한 범죄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해자의 사연이 사라진 극의 중심에는, 고통을 극복하려 애쓰는 피해자들과 범인을 밝히려 노력해온 형사들의 이야기가 놓인다. 수많은 범죄스릴러에서 범인이 얼마나 잔혹한 악마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처럼 묘사되어왔던 피해자들은 이 작품에서 고통 가운데서도 삶의 의지를 이어가고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용기를 내는 강인한 생존자로 그려진다. 형사들의 수사과정 묘사에서도 기존의 미디어가 강력범죄를 다뤄온 방식의 핵심적인 문제점을 환기하고 있다. 강력범죄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언론은 사건과 관련된 단편적 현실을 주로 보도하고, 범행 수법을 상세하게 묘사하며, 범죄를 개인의 병리적 문제로 바라본다. 이와 달리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철저하게 피해자의 시각을 통해 폭력의 순간을 짧게 재현하고, 범죄 이전에 이를 가능하게 한 근본적인 시스템의 문제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아무도 여성 대상 폭력의 자료를 들여다보지 않는” 성차별적 현실과 ‘강간 문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얼마 전 국내에서는 최악의 장기 미제 사건이었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밝혀지면서, 강력범죄를 보도하는 미디어의 자세가 도마에 올랐다. 지난달 27일,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발표한 신문방송 모니터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언론은 여전히 범죄 수법을 지나치게 상세히 묘사하는 문제점을 되풀이하고 있다. 성범죄자의 범죄 동기와 개인성향 등에 주목한 보도도 지나치게 많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의 모니터 발표 이후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도 같은 문제를 반복했다. ‘악마의 시그니처’라는 부제 아래 범인의 사악함을 부각시키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상세히 묘사해 비판을 받았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성취는 국내 미디어에 대한 반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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