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세 청춘이 그려내는 ‘나의 나라’

2019.10.24 21:16 입력 2019.10.24 21:19 수정

드라마 <나의 나라>의 한 장면. 요동 전장의 한복판에 서휘(양세종)가 서 있다.  JTBC 제공

드라마 <나의 나라>의 한 장면. 요동 전장의 한복판에 서휘(양세종)가 서 있다. JTBC 제공

JTBC 금토드라마 <나의 나라>는 고려 말 조선 초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다. 여말선초는 사극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이지만, <나의 나라>는 이 시대의 주인공으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성계나 정도전, 이방원 등과 같은 ‘거인’들이 아니라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격동의 역사를 뜻하는 물 흐르는 듯한 배경 위에 주요 인물들의 얼굴을 차례차례 클로즈업하는 대작 사극들의 오프닝과는 달리, 주인공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오프닝 타이틀이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나의 나라>는 ‘시대를 이끌어간 거인들의 거대한 족적에 묻힌 작은 발자국들’의 이야기를 표방한다.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벼랑 끝  세 청춘이 그려내는 ‘나의 나라’

<나의 나라>의 이 같은 역사관은 근래 사극의 경향과도 일치한다. 최근 이 장르의 흐름은 역사 속 위인들의 이야기에서 역사가 배제한 수많은 무명씨의 이야기로 이동하는 추세다. 가령 SBS <육룡이 나르샤>는 조선 건국의 대업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백성을 대변하는 인물들이 정도전(김명민), 이방원(유아인), 이성계(천호진) 등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MBC <역적>은 “천하디천한 이름”이었던 씨종 아모개(김상중)의 아들 길동(윤균상)을 통해 기존의 홍길동 영웅신화를 해체했으며, SBS <녹두꽃>은 동학농민혁명을 다루면서 녹두장군 전봉준(최무성)보다 민초들의 이야기를 앞세웠다.

<나의 나라>의 주인공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유령과도 같은 존재들로 묘사된다. 서휘(양세종)는 부친 서검(유오성)이 누명을 쓰고 죽은 뒤, ‘귀신과 다를 바 없는 팽형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핍박당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젊은이다. 그의 벗 남선호(우도환)는 적자인 형이 사고로 죽자 그를 대신해 후사의 지위를 차지하지만, 멸시당하는 얼자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등 뒤에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자결을 택한, 이름도 없는 노비 모친의 원혼이 어른거린다. 또 다른 주인공 한희재(김설현) 역시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모르는’ 기방 이화루에서 의탁할 혈육 하나 없는 고아로 자라났다. 첫 회에서 운명적으로 뒤얽힌 세 청춘은 각자가 꿈꾸는 나라에 관해 단 한 번 대화를 나눈다. 선호가 “지긋지긋한 서얼 팔자를 뒤집을” 세상을 꿈꾸고, 희재가 백성들의 고통에 귀 막은 나라를 비판할 때, 드라마는 “너희들이 말하는 나라가 뭔진 몰라도 난 밥이 나라”라고 말하는 서휘의 소박한 꿈을 더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실제로 나라가 뒤집히고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 동안에도, 서휘와 같은 밑바닥 백성들에게 ‘생존’은 최우선 과제가 된다.

드라마의 이러한 주제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흔히 여말선초 사극의 결정적 장면이라 불리는 위화도 회군 에피소드다. 기존의 사극은 회군을 앞두고 갈등하는 이성계의 해석에 집중했지만, <나의 나라>는 위화도 회군에 가려진 이야기에 주목한다. 이성계(김영철)의 고뇌가 “나의 나라는 무엇인가. 썩어 문드러진 고려인가, 아니면 날 따르는 백성들인가. 그도 아니면 스스로의 나인가”라는 짧은 내레이션으로 처리되는 동안, 드라마가 집중적으로 비추는 것은 그 시간에도 살아남고자 몸부림쳤던 요동 정벌 선발대의 지옥같은 전쟁터다.

특히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5분여 롱테이크의 요동 전투 신은 단순히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을 넘어서 드라마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나라를 위해, 혹은 공을 세우기 위해 활약하는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는 병사들에서 또 다른 병사들의 모습으로 옮겨갈 뿐이다. 그들을 화살받이 취급하는 선발대장에게 “우리들 중 이름을 아는 자가 하나라도 있소? 이름을 대보시오!”라고 울부짖는 서휘의 말은 이름 없이 죽고 망부에도 기록되지 못한 백성들 모두의 절규다.

‘대의를 부르짖는 거인들의 역사 수면 아래 지옥’에 주목하는 드라마의 이러한 태도는 조선 건국 에피소드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된다. “바뀐 것은 나라다. 세상이 아니라”는 이방원(장혁)의 말처럼, 새 나라가 세워졌어도 위계의 질서는 공고하다. 고려말의 적폐는 청산되지 않았고, 백성을 때려죽여도 탄핵은커녕 조사조차 받지 않는 자들이 개국공신이라는 이름으로 활개를 친다. 나라의 핍박을 참다못해 산속으로 피신했던 고려말 백성들이 새 왕조가 들어선 뒤에도 “나라가 뒤집히면 뭐하나? 달라질 것 없다”며 산에 계속 머무는 장면은 밑바닥 삶의 변함없는 현실을 말해준다.

세 청춘의 희망 없는 삶도 여전하다.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은 모두 권력자들의 ‘곁’에 서서 살아남는 길을 선택한다. 선호는 이성계의 편에, 서휘는 훗날 이방원의 편에 선다. 신덕왕후 강씨(박예진)의 편에 섰던 희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권력의 판도를 지켜본다. 이성계와 이방원의 권력 투쟁이 본격화하면서, 세 사람의 운명은 그들이 택한 권력자들에 의해 엇갈린다. <나의 나라>는 그렇게 격변의 시대 속 흔들리는 청춘들을 통해 생존이 모든 가치에 앞선, 각자도생이 지배하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비추고 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