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자본주의

2019.12.20 20:58 입력 2019.12.20 21:02 수정

중학생 때, 내가 다니던 교회는 담쟁이넝쿨이 본당의 벽을 뒤덮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설레는 마음에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갔다. 어느 날부턴가 노동이 전부였던 어머니가 새벽녘 자고 있는 내 머리맡에 던져놓던 백원짜리 동전이 보이지 않았다. 일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헌금시간이 돌아오자 손을 헌금 자루에 집어넣고 돈을 내는 척했다. 장부에도 거짓말로 금액을 적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번이지 몇 주가 지나자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아니, 나갈 수가 없었다. 거짓말은 하느님이 잘 아실 테니까.

[사유와 성찰]종교와 자본주의

그 교회는 우람하게 성장해 있다. 근처를 지날 땐 옛날 친구들 생각에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나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릴 적 소박했던 교회 모습이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종교의 세계에 깊이 들어와 있는 나는 늘 자신에게 묻는다. 종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종교는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오늘날 종교는 사회가 짊어질 짐으로 전락했으며, 그것은 종교전문가들이 자신의 교의를 팔아 연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성소 안에서는 그럴듯한 위안을 주지만, 성소 밖의 일은 남일처럼 보고 있다고 비판한다.

원인은 자본주의다. 오늘날 종교는 자본의 논리를 답습한다. 자본주의 방식 그대로 독점과 경쟁이 이루어진다. 머지않아 종교도 인수·합병이 봇물처럼 이루어질 것을 예감한다. 하늘과 인간 간 중재의 대가는 돈으로 환원된다. 돈 많은 신도는 맨발로 뛰어나가 맞이한다. 절망에 휩싸인 이웃은 종교 울타리 밖에서 배회한다. 돈이 있어야 종교를 믿을 수 있다는 말은 보편적인 언사가 되었다. 돈 많이 낸 신자는 당연히 종교의 핵심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역으로 직업적 종교인들에게 훈계한다. 물신을 섬긴 결과다.

생각해보라. 불타든 예수든 교조들의 어느 어록에 ‘돈을 내라’는 말씀이 있는가. 큰 절과 큰 교회를 지어야 종교의 면목이 선다고 한 대목이 어디에 있는가. 가르침대로 한다면, 고결한 우리 마음이 모인 곳이 절이자 교회며, 성당이자 교당이 아닌가. 교조들은 돈 한 푼 없이 개업했다. 종교적 희열에 가득 찬 신자들은 감격에 겨워 자신이 가진 것을 내밀었다. 돈은 주가 아니라 종이다. 자비와 사랑과 깨달음이 주이지 종이 아니다. 오늘날 종교 성소의 존재 의미가 사라져 가는 까닭은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사회 모든 영역에 불안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원자력과 같다. 종교는 원자로 주변을 서성이며 일말의 온기를 먹으며 생존한다. 부조리한 기존 질서의 파괴를 외치며 나타난 교조들은 종교전문가들에 의해 숭배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들의 행위, 그들의 진정한 뜻을 재현해야 함에도 그저 말로만 외치고 있다. 나아가 자본으로 공고해져 가는 사회계층을 긍정하며, 가르침의 혁명적 요소들을 애써 외면한다. 자신의 표와 정당성 확보를 위해 찾아오는 정치가에게 고개를 숙이며 친분을 과시한다.

우리 또한 돈이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 같은 자본의 감옥에 갇혀 살고 있다. 간수의 말을 듣고, 질서를 지키며, 교육을 받아도 이곳을 빠져나올 수는 없다. 돈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출소할 수 있다. 돈으로 박탈당한 영혼의 자유를 회복시키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다. 그러나 종교는 영혼 구제의 처방전인 진리마저 독점한다. 그리고 처방의 효능을 경쟁한다. 어떻게 진리가 독점될 수 있는가. <도덕경>의 비유를 들자면, 진리를 진리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진리는 체험과 실천의 영역이지 언어의 영역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말의 난무는 종교가 이미 길을 잃었음을 보여준다. 자본의 논리처럼 소유의식의 적나라함만을 드러낸다.

종교가 비판받는 이유는 위기에 처한 민중의 고통을 해소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의 의미를 무화시키는 전쟁을 생각해보라. 종교는 대량살육인 1·2차 세계대전도 못 막았다. 힘센 자들이 한반도를 놓고 전쟁 운운하는데도 종교는 그 무도한 언설을 비판하지 않는다. 하물며 고통으로 절규하는 노동자와 이주민들의 아픔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는가. 종교는 희망고문만을 가하고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나를 따르라>에서 외치듯이, 예수 자신이 신학이 되고, 교회가 되고, 종교가 된 그 원천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종교의 미래는 없다. 자본은 곧 종교를 집어삼킬 것이다. 그것은 종교가 욕망과의 대결에서 패배했음을 의미한다. 공회당의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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