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독’, 교사들의 ‘배틀로열’

2020.01.16 20:52 입력 2020.01.16 20:55 수정

드라마 <블랙독>의 주인공 고하늘(서현진).

드라마 <블랙독>의 주인공 고하늘(서현진).

tvN 월화드라마 <블랙독>은 한 고등학교의 수학여행 버스 전복 사고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언제 폭발할지 모를 버스 안에서 모두가 급히 탈출하는 과정에서,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있던 학생 한 명은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교사 김영하(태인호)는 다시 터널 속으로 뛰어들어 학생을 구해내지만, 정작 자신은 폭발과 함께 무너진 터널 속에 갇히고 만다. 학교는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하는 대신, 유족들에게 김영하 선생은 “진짜 선생”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기간제예요. 계약직 선생이라고요.” 넋을 잃은 유족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사람이 죽었어요”라는 한 문장뿐이었다.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블랙독’, 교사들의 ‘배틀로열’

세월호 참사 당시 학생들을 구하다 목숨을 잃은 고 김초원·이지혜 교사의 이야기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 도입부다. 숭고한 희생에도 순직 인정조차 받지 못했던 그들의 아픔은, 기간제 교사들의 차별적인 현실을 환기하는 계기가 됐다. <블랙독>은 이 비극을 연상케 하는 도입부를 통해 아직도 여전한 차별에 시달리는 기간제 교사들, 더 나아가 모든 교사의 직업적 애환을 이야기한다. 드라마의 주인공 고하늘(서현진)은 전복 사고에서 김영하 선생이 목숨을 바쳐 구한 바로 그 학생이다. “선생님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걸까”를 물었던 고하늘은 사고 11년 뒤, 김영하 선생과 같은 기간제 교사가 되어 편견과 차별의 한가운데서 고군분투하면서 진정한 교사의 의미를 찾아 나간다.

학원물의 전통 안에서 “진짜 선생”이라는 화두 자체는 매우 익숙한 주제어다. <블랙독>의 차별점은, 그 대답을 그리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언급하지 않았던 ‘노동자’로서 교사의 정체성을 조명한다는 데 있다. 그동안 학원물 속 교사들의 성격은 대부분 학생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됐다. 학생들을 억압하는 나쁜 선생, 학생들을 아끼고 바른길로 인도하는 참스승, 그리고 학생들에게 무관심한 방관형 교사 등이 대표적 유형이다. 이 같은 제한적 묘사는 교사라는 직업의 특수성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교사는 노동자 이전에,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사명감이 강조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독특하게도 <블랙독>에서 교사들의 ‘교육 업무’는 그들이 수행해야 할 수많은 업무의 하나로 그려진다. 드라마는 기간제 교사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에서부터 출발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교사들의 다양한 업무와 노동 조건을 현실감 있게 묘사한다. ‘학교판 <미생>’이라 불리는 이유다. 이러한 묘사가 중요한 것은 그동안 입시제도, 사학비리, 교육정책, 무한경쟁 시스템 등 주로 학교 바깥에서 접근했던 공교육의 문제를 학교 내부에서부터 바라보며 새로운 해법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입시 경쟁에 내몰리는 동안 교사들은 무얼 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블랙독>은 끊임없는 메신저 지시에 답하고 수십장의 기획안을 작성하느라 옆자리 동료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노동자들의 피로한 얼굴로 답한다.

대표적인 장면이 고하늘의 방과후 수업 계획을 둘러싼 갈등이다. 토론을 비롯한 다채로운 활동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고하늘의 계획서를 보고 방과후부 교사들은 한숨부터 쉰다. 같은 기간제 교사이자 방과후부 선생인 송지선(권소현)은 고하늘에게 말한다. “그냥 평범한 수업 하시면 안될까요. 우린 여기 계속 있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선생님이 그걸 만드시고 내년에 이 학교에 없으면 다른 선생님이 그걸 이어서 가야 하는데 좀 그렇잖아요. 쌤, 이렇게 열심히 안 하셔도 돼요. 딱 중간, 그 정도만 해도 되지 않겠어요.” “애들을 위해서”라는 고하늘의 열정은 이상적이지만, 현실에서 그 이상은 혼자만의 힘으로 실현하기 어렵다.

<블랙독>은 어떤 교사를 나쁜 선생, 좋은 선생으로 가르기 이전에 학교라는 현장이 그들을 어떻게 좌절시키고 현실 순응적으로 만드는가를 비판적으로 그린다. 이 같은 현실의 제일 큰 문제는 교사가 잡무에 시달려 정작 아이들을 어떤 인간으로 길러낼 것인가, 즉 교육의 근본적 의미를 물을 여유가 사라진다는 데 있다. 교사들조차 서로 평가하고 경쟁해야 하는 ‘배틀로열’ 속에서 <블랙독>은 ‘선생의 의미’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만큼은 잊지 말자고 겨우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진학부장 박성순(라미란)이 전체교사회의에서 입시에 목맬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역할을 일깨우는 장면이 그렇다. “활동하고 나면 애들 한 명 한 명 관찰하고 생기부에 그 과정까지 써주는 겁니다. 혹시 애들한테 다른 사정 있는 건 아닐까 관심 있게 봐주고, 시험 문제 낼 때도 학원 안 다니고 집 어려운 애들도 풀 수 있을까 생각하고. 다 우리 애들이잖아요.” 교사라는 직업의 특수성으로 인해 그 애환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공교육의 마지막 버팀목 역시 그 특수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블랙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