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뉴질랜드의 ‘무례’가 부럽다

2020.08.13 03:00 입력 2020.08.13 03:04 수정

3년 전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에서 벌어진 성추행 의혹 사건이 뒤늦게 국내 뉴스에서 부각되고 있다. 지난달 28일 뉴질랜드 총리와 문재인 대통령의 정상통화에서 ‘성추행 외교관’이 거론되더니, 30일 뉴질랜드 외무부는 한국 정부가 수사에 비협조적이라며 실망스럽다고 했다. 지난 1일엔 뉴질랜드 부총리가 “결백하다면 이곳에 와 사법절차에 따르라”고 연달아 직격했다. 국가망신이란 여론이 비등하자, 외교부는 지난 3일 아시아 주요국 총영사로 근무 중인 외교관에 즉각 귀임 발령을 냈다. 오는 17일이 시한이다.

송현숙 논설위원

송현숙 논설위원

외교부는 해당 외교관의 징계와 전보에 절차상, 규정상 문제가 없었다며 억울하다는 태도다. 주한 뉴질랜드 대사를 불러, 공식 사법절차를 무시한 채 언론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조율되지 않은 의제를 정상통화에서 언급한 것은 관례에 어긋난다고 유감을 표했다. 그러나 정말 억울하다면 합당하게 사안을 처리했음을 투명히 밝히고 뉴질랜드에 정식으로 항의해야 한다. 당사자의 성추행 사실 강력 부인에도 왜 ‘감봉 1개월’을 내렸는지, 문제가 없다면 왜 귀임을 명했는지 납득되지 않는다. 외교부의 국회 답변에 따르면 감사 과정에서 피해자 진술은 반영되지 않았고, 폐쇄회로(CC)TV 등 증거 조사도 없었다고 한다. ‘감봉 1개월’ 경징계에 ‘성비위 무관용 원칙’이 무색하다.

뉴질랜드 언론과 정부는 성추행 당했다는 남성 직원을 ‘피해자(victim)’라 부른다. 단서는 증언뿐이지만, 뉴질랜드 법원은 한국 외교관의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지난달 25일 현지 언론에 심층 보도된 후 사회 전체가 한 시민이 당한 성추행에 분개하고 있다. 외교 관례에 어긋난다는 논란을 감수하고 뉴질랜드 정부와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확실하다. 직장 내 성추행, 성범죄는 결코 덮고 넘어갈 수 없게 하겠다는 것이다.

한 달 전인 7월13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영결식이 진행됐다. 그날 오후엔 피해자 측 기자회견이 있었다. 충격과 혼란 속에서도 여론의 축은 철저한 진상규명과 이를 통한 재발방지 대책 마련이었다. 그런데 ‘피해호소인’ 용어 공방이 한참 동안 일더니, 진상규명의 열쇠가 될 증거물의 압수수색 영장이 줄줄이 법원에서 기각되며 수사 손발이 묶였다. 박 전 시장의 업무용 휴대전화 디지털포렌식은 유족 측 요구로 잠정 중지됐고, 서울시청 6층 비서실 압수수색도 불발됐다. 국가인권위원회 직권조사도 강제수사권이 없어 장기 표류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국정 책임자들의 태도다.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는 ‘박원순·오거돈 전 시장 사건이 권력형 성범죄가 맞냐’는 질문에 우물쭈물하며 존재이유마저 의심받았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던 문 대통령은 지금껏 원론적인 입장표명조차 없다. 부동산, 장마 이슈로 어느덧 성추행 의혹 사건은 지워지고 있다. 오죽하면 답답한 시민들이 감사원 국민감사청구에 나섰다.

더불어민주당은 박 전 시장 사망 이후 ‘님의 뜻 기억하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직장 내 성희롱 처벌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기념비적인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을 박 전 시장과 함께 변론했던 이종걸 민주당 의원은 방송에서 “박 시장은 무덤 속에서도 국민이 원하면 진상규명하라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시장의 28년 동지이자 한국여성의전화 대표 출신인 정춘숙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긴 번민 끝에 “박원순을 빼고 봐야 보인다”는 한 문장이 남았다고 했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았다고 치자. 아이에겐 장난이지만, 개구리는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문제 아니냐? 피해자가 성희롱으로 성적 모독감을 느꼈다면 피해자의 관점에서 보는 게 요즘의 보편적 이론이다.” 박 전 시장은 신 교수 사건 항소심 패배 후, 상고장에서 수인한도(피해를 참을 수 있는 정도)를 언급한 항소심 판결을 이렇게 반박했다. 그 유명한 피해자 중심주의다.

성폭력은 날마다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다. 뉴질랜드 사례처럼 여성만의 문제도 아니다. 안희정, 오거돈 사건도 아직 진행형이다. ‘박원순 사건’을 제대로 매듭짓지 않고는 우리 사회의 인권, 성평등은 전진할 수 없다. 생전 고인의 뜻대로 피해자 입장에서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제2, 제3, n번째의 권력형 성범죄의 고리를 끊는 길이다. 원칙대로 투명하게 시시비비를 가리고, 잘못은 바로잡아 재발방지책을 마련하라는 것이 무리한 요구인가. 시민들의 요구에 적극 공감하는 뉴질랜드의 ‘무례’가 차라리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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