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나라로부터

2020.11.03 03:00 입력 2020.11.03 03:02 수정

내가 사는 곳은 본래 돼지의 땅이었다. 강원도 인제는 ‘기린 린’자에, ‘발자국 제’를 써서, ‘기린 발자국’이라는 이름. 기린은 신화에 나오는 상서로운 동물을 이른다. 이곳의 옛 지명 중에는 ‘돼지 저’자가 들어간 저족현도 있어, 그 상서로운 동물이 당연히 돼지일 것으로 짐작한다. 돼지 발자국이란 이름은 그만큼 돼지가 많은 땅이란 뜻이겠다. 그 돼지의 땅에 사람들이 스며들었을 것이고, 돼지는 산을 사람들과 나눴다. 그 옛날 이토록 깊은 산속까지 살려고 들어온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에게 집을 주고, 불을 주고, 먹고살게 해준 산은 어떤 산이었고, 돼지는 어떤 돼지였을 것인가? 신령하고 상서로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그 돼지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제 이름이 지명이 된 땅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길목마다 이런 플래카드가 붙어있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발생, 입산 금지, 멧돼지 사체 발견 즉시 신고.” 그 앞에 설 때마다 저곳과 이곳을 나누는 결계 앞에 서는 기분이다. 이곳의 나는 안전한가? ‘포획 작전’이 있는 날은 인근 주민들에게 주의하라는 안내 문자가 온다. 멧돼지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총소리도 같이 들린다. “뭘 조심하란 말이야!” 불만을 토하는 노인들의 말에는 노기와 두려움이 함께 서려있다. 멧돼지 토벌작전은 옛날의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한양에서 온 높은 양반들이 사냥하다 사람을 돼지로 알고 죽였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떠도는 곳.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돼지의 죽음을 보고 있을까. 이곳은 또 다른 ‘접경지역’이다.

인간과 동물이 몸을 바꾸는 민중설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하다. 동물과 인간이 결혼을 하고 친족관계를 맺는 것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는 같은 땅에서 태어난 형제를 함부로 살해하지 못하도록 규율을 정한다. 귀족은 혈통으로 가계와 가문을 이루지만 민중의 가족은 언제나 ‘땅의 가족’이며 ‘동물 가족’이다. 숲의 가족들과 맺은 공유지의 협약은 지금도 산사람들에게 남아있다. 주는 것 이상으로 가져와선 안 된다. 산에서 욕심을 내다간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다. 증여의 규칙을 어기면 다음 해에 먹고살 것을 얻지 못한다. 다친 짐승은 도와주어라, 그러면 그가 반드시 너를 도와줄 것이다.

돼지가 죽어있다는 숲을 지날 때마다 나는 자꾸만 그 이야기들이 생각난다. 고대 그리스말로 ‘행복’을 뜻하는 ‘에우다이모니아’는 다이몬들이 평안한 상태를 말한다. 다이몬은 올림포스산에 사는 불사의 신들과는 다른 종류의 신들로, 인간의 거주지에 함께 사는 뭇 생명의 혼령들이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좋은(eu) 다이몬(daimon)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다. 돼지의 비명으로 가득 찼던 숲에 좋은 다이몬이 깃들 수는 없다. 우리가 사는 세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 연결되어 있다. 에우다이모니아는 다 함께 행복하지 않으면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는 믿음이다.

동물신화로부터 우리는 인간과 동물이 맺을 수 있는 다른 관계를 상상할 수 있다. 그 속에는 현존하는 인간과 동물의 호혜적 관계뿐만 아니라 죽은 자와 산 자의 연대와 공존에 대한 민중적 감각이 남아 있다. 석탄과 석유도 죽은 몸들이 남긴 선물이었다. 자본의 손에 들어가 생명을 잡아먹는 기계의 동력이 되었을 뿐이다. 태양과 바람도 마찬가지다. 녹색이 자본주의의 동력이 되면 그때는 ‘착한 에너지’가 노동자를 잡아먹을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외부는 없다’는 주술에 너무 강력하게 포획되었다. 미래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봉쇄를 해제하려면 무엇보다 ‘외부의 사유’가 필요하다. 대지의 상상력은 가장 급진적인 정치적 상상력이다. ‘동물정치’는 정치의 주체를 다시 재구성한다. 우리는 누구와 연대하고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죽임의 자본권력에 저항하는 생명들의 연대 요청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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