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2022.07.11 03:00 입력 2022.07.11 03:03 수정
김정수 시인

[詩想과 세상] 골목

눈 깊어진 당신이
귀 얇아진 당신이

지난 시간의 흔적을 밟아온 휘파람 소리는
은회색의 저녁, 긴 꼬리를 끌어당긴다
사람꽃 져버린 자리,
온기 없는 골목이 슬그머니 미끄러진다
서쪽으로 밀린 구름들도 작당했는지
물끄러미, 서슬이 붉다

나 없이도
여전히 아름다운 세상이다

진란(1959~)

넓고 번잡한 도로는 골목과 연결돼 있다. 담과 벽이 마주한 골목에는 전봇대가 서 있고, 적당한 높이를 차지한 보안등이 밤을 밝힌다. 골목을 지나가면 어둡다 밝아지거나 밝았다 어두워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우리 삶을 닮았다. 골목에는 보도블록 사이에 핀 씀바귀꽃,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 자전거, 느릿느릿 걸어가는 고양이, 전선에 앉아 있는 새 떼 등은 그대로 풍경이 된다. 골목은 여러 개의 문을 달고 있다. 막힌 골목은 길의 시작이자 끝이다.

골목은 만나는 사람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어두운 골목을 혼자 걷다 사람과 마주치면 무섭거나 쓸쓸하다. 아이를 만나면 사랑스럽고, “눈 깊어진 당신”과의 연애는 낭만적이다.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한때의 “휘파람 소리”처럼 시들해진다. 다 귀가 얇은 당신 탓이다. 당신이 떠난 골목엔 온기조차 없고, 붉은 서슬에선 한기가 느껴진다. 슬픔은 골목에 혼자 남겨졌거나 다시 찾아온 사람의 몫이다. “나 없이도” 세상은 아름답다. 골목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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