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미안하지가 않아?

2023.05.25 03:00 입력 2023.05.25 03:02 수정

지나가는 사람에게 갑자기 폭행을 당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것을 ‘무차별’ 또는 ‘묻지마’ 폭행이라고 틀리게 부른다. 하지만 실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차별적’으로 골라내어 반격당할 가능성이 없는지 꼼꼼히 ‘물어본’ 폭력이다. 아무리 우발적인 폭행이라도 때린 사람에게는 명백한 인과와 나름의 선별이라는 서사가 있다. 서사를 가지지 못한 쪽은 맞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무차별’ 또는 ‘묻지마’ 폭행은 때린 사람이 아니라 맞은 사람의 입장에서만 가히 마땅한 말이다. 게다가 가해자로부터 인정도 사과도 받지 못한다면 어떨까. 원숙한 심리상담가라면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마음의 키를 가해자에게 쥐여주지 마세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나에게 마음의 통제권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는 서사가 없는 한, 피해자에게 사건은 종결될 수 없다. 아무리 잊으려고 발버둥 쳐도 ‘왜’와 ‘어떻게’라는 숨막히는 회로에 갇혀 맴돌게 된다. 대체 왜 그랬어? 어떻게 미안하지가 않아?

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권여선의 단편소설 ‘사슴벌레식 문답’(<각각의 계절>, 문학동네, 2023)의 부영도 그것이 너무나 궁금했다. 대학 시절 동고동락하며 사랑했던 친구 고경애가 도대체 미안하다고 말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북의 지령을 받은 간첩 조직이 있다는 고경애의 거짓 진술로 부영은 사찰과 고문에 시달리고 부영의 남편은 8년 동안 복역하지만, 진술을 번복해달라고 아무리 애걸복걸해도 고경애는 녹음된 기계처럼 똑같은 말로 부영의 사정을 차단한다. 나는 팩트만 진술했어. 그게 너희 부부에게 미안하지 않은 이유야.

미칠 것 같은 심정으로 이를 지켜보는 친구 준희는 30년 전 함께 떠났던 강촌 여행에서 알게 된 사슴벌레식 문답을 떠올린다. 질문의 의문사에 ‘든’을 붙여 어떤 대답도 의연하게 만드는 문답. 대답하는 사람의 의지와 욕망에 힘을 실어주는 근사한 방법이라고 여겼지만(너는 어떤 소설을 쓸 거야?/나는 어떤 소설이 ‘든’ 쓸 거야), 준희는 이제 이것이 어떤 의문도 반사하는 잔인한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고경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문답으로 죄책감을 회피하고 자기를 합리화해왔을까(어떻게 미안하지가 않아?/어떻게 ‘든’ 미안하지가 않아). 하지만 부영은 교수 자리를 보전해준다는 회유 탓일 거라며 고경애의 처지를 이해하려고도 해보고, 준희는 30년 전의 기억을 처절하게 더듬으며 불면에 시달리던 고경애의 시간을 상상하는 일을 멈추지 못한다. 이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에서 ‘그럴 수도 있지’로 어떻게든 서사의 폭을 넓혀보려는 까닭은, 상대의 사정을 헤아려보는 시도가 절박한 쪽은 언제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지난 5월18일 광주를 찾아가 사죄하는 전두환의 손자를 따뜻하게 반기는 유족들이 있었다. 학살이라는 끔찍한 죄를 대속하는 이의 복잡한 사정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정을 이해해보려는 피해자들의 마음이다. 대속하는 이에게는 사죄할 결심이 필요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사과를 기다린 이에게는 용서할 결심조차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은 조금도 불가해하지 않다. 수십년간 갈증을 느껴온 이가 한 방울의 물을 흡수하듯 그 혜량의 정도는 고통의 깊이에 비례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그러운 혜량이 감동적인 것이 아니라 용서 말고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길 없는 절박함이 슬픈 것이다.

43년 만의 사죄가 “당시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느낌”이라는 막말 속에서 사과는 아무리 해도 충분하지 않다. 어떤 인과도 서사도 가져보지 못한 사람에게 사과는 사건의 종결이 아니라 그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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