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해촉해 주세요

2023.06.20 03:00 입력 2023.06.20 03:01 수정

2019년 9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본위원회 공익위원으로 위촉됐다. 맡고 보니 중책이었다. 청와대 인사검증이란 걸 처음 받아봤다. 주위에서 “출세하셨다”는 말도 들었다. 대통령·장관과 같이 앉아 회의하는 자리이니 높은 지위가 아니냐는 말이었다. 그런가 하면 “뭔가 역할을 할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가라”는 조언도 들었다. 탄력근로제 문제로 파행이 있었던 직후라 경사노위가 제 기능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 했다. 그래도 ‘공익위원’이라는 이름에 맞는 역할이 뭐라도 있겠지, 막연한 기대를 했었다.

황세원 일in연구소 대표

황세원 일in연구소 대표

3년9개월여가 흐른 지금, 나는 여전히 그 직책을 맡고 있다. 그동안 본위원회는 단 세 번 열렸다. 서면회의까지 합쳐도 여덟 번이다. 탄력근로제가 통과된 첫 회의 이후로는 대부분 이렇다 할 안건도 없었다. 코로나19 시국이라는 특수한 사정도 있고, 본위원회보다는 의제·업종·계층별 위원회가 잘 운영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도 해봤다. 대리운전·돌봄노동·방송사 프리랜서 등 주목받지 못했던 업종에서 노사정 대화가 시작된 것, ‘이제부터 노력한다’는 선언적 내용들이 대부분이긴 해도 합의문을 도출한 사례들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경사노위 역할이 이것뿐인가 실망스럽기는 했다. 내가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정부 쪽에 있었다. 사회적 대화에 걸맞은 국가 차원의 의제를 내놓고 노사가 전향적 해법을 모색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 공약이나 정부 시책에 대해 절차적 정당성만 얻으려는 모양새였다. 이런 국면에서는 한쪽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고 그쪽은 대체로 노동자였다. 노동계가 수세적 태도를 보여온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내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한국노총은 경사노위에 진심으로 참여한 주체였다. 요청받는 거의 모든 위원회에 위원을 참여시켰고, 본위원회에서도 노동계 편만 들어달라는 식의 발언을 하는 걸 보지 못했다. 반면 경영계는 ‘고용 유연성’ 같은 민감한 단어를 발언 기회마다 반복했다. 보통 노동계보고 “떼쓴다”고 하던데, 나는 반대로 느낀 적이 많았다. 이렇게 ‘공부’나마 할 수 있었던 기회도 2021년 6월 본위원회가 마지막이었다. 이날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자격으로 처음 참석한 최태원 SK 회장이 “파이를 나누기보다 같이 키워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에 뭔가 달라지려나 했으나 그뿐이었다.

지난해 10월 사무국에서 해촉을 해야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임기가 1년 정도 남았지만 동의해줬다. 대통령도 바뀌고, 위원장도 바뀌었으니 새로 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그 이후 8개월이 지났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서면으로 안건 동의 요청이 한 번 왔을 뿐이다. 그밖에는 위원장 동정 자료뿐이라 경사노위가 위원장 개인의 홍보기구가 된 듯하다. 그런 데다 최근 정부의 노조몰이 결과로 한국노총마저 불참을 선언했다. 청년·비정규직 분과, 대리운전 및 돌봄노동 분과 등도 모두 지난해 종료됐다고 한다.

이렇게 된 데는 내 책임도 있다. 해촉조차도 8개월째 못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무관심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차라리 새 위원회를 구성한다고 시끄러운 게 지금보다 나을 듯해서, 마지막 역할로 이 지면을 빌려 요청드리고자 한다. “이제 그만 해촉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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