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깊은 나라의 천박한 정치

2023.11.07 20:27 입력 2023.11.07 20:28 수정

사주에 역마살이 들었나 싶었다. 어린 시절엔 군인 아버지 따라 전국을 떠돌더니, 직장에 들어가서도 대도시는 물론 웬만한 군단위 지역까지 출장을 다니며 잦은 여관살이를 했다. 서울과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지역발전 격차를 체감한 시간이었다. 다양한 나라의 사회와 역사, 문화에 관심이 많다보니 배낭여행도 이른 나이에 시작했다. 바쁜 생활 중에도 꽤 많은 나라와 도시를 다녔고, 해외출장이나 파견연수도 세상 보는 눈을 넓혀주었다.

야간열차나 밤버스로 장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광활한 국가들은 도착하는 곳마다 전혀 다른 기후와 풍광으로 피로를 잊게 만들었다. 문명과 종교의 교류, 왕조의 흥망성쇠가 활발했던 곳들은 수도만이 아니라 지방 도시들도 이국적인 매력의 거리와 유적, 예술품들이 넘쳐났다. 마을도 사람과 같아서,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은 자신만의 개성과 스토리가 풍부하고 자부심도 강하다.

파견근무로 한동안 머물렀던 일본이나 영국도 그랬다. 도쿄, 런던만이 아니라 작은 도시도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았다. 올 상반기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만 300만명이 넘는데 한국을 찾는 일본인의 4배에 가깝다고 한다. 환율 문제도 있지만, 일본은 새로운 역사·문화 체험을 할 만한 중·소도시의 재방문율도 높은 반면 한국 관광은 서울에만 80% 가까이 몰리고 말아서라고 한다. 서울 외의 지역은 잘 알지도 못하고 교통·체험문화 등의 관광 인프라가 취약해서다.

최근 몇년. 해외보다는 통영, 목포, 신안, 여수, 구례, 하동 같은 유서 깊은 도시들을 종종 돌아봤다. 배낭여행하듯 여유롭게 묵으며 공부도 하며 살펴보니,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답게 곳곳에 숱한 이야깃거리가 있다. 아쉬운 것은 오래전 출장을 다닐 때보다 큰 발전도 없고, 외국 관광객들의 말대로 ‘가벼운 인스타 감성’만 있지, ‘깊이와 향기’가 전달되지 않는 곳이 많다는 점이다. 보석 같은 문화 유산 콘텐츠들이 진부하고 획일화된 방식으로 운영·관리되는 모습도, 이를 발전시킬 젊은 인재들을 유치할 환경도 못 되는 상황이 안타깝다.

지난주 한국은행 보고서는 저출생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이 지나친 지역 간 격차로 인한 청년층의 수도권 유입과 경쟁과잉, 이로 인한 심리적 불안과 위축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했다. 이 추세라면 지속적으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는 줄어드는 반면 수도권 인구 비중은 더욱 높아질 것이므로, 지역 거점도시를 만들어 사회간접자본시설을 확충해야 수도권 인구 비율 및 우리나라 전체 인구 감소폭을 줄일 수 있다는 의견이다. 한국은 인구의 50%가 국토면적 11%에 밀집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도 가장 기형적인 수도권 중심 국가다. 서울 말고는 다 시골이고, 대전은 빵집, 부산은 바다만 떠올린다는 농담이 농담이 아닌 것이다.

국토 대부분이 사막이나 황무지여서 특정 입지 좋은 곳에 메가시티가 들어서야 하는 척박한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전국 어디든 반나절이면 갈 수 있고 아름다운 산과 바다, 강과 들녘이 넘쳐나는 환경이다. 또한 젊은 세대들은 여건만 갖춰진다면 어디에서건 일과 여가를 동시에 즐기는 워케이션족으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러한 바람 속에 떠오른 해변 도시가 서핑 명소인 강원도 양양이다.

비정상적인 서울 편애와 심각한 저출생, 입국자보다 출국자만 넘쳐나는 K관광의 시대에 참으로 뜬금없는 ‘김포 편입설’로 온 나라가 술렁인다. 서로 다른 개성과 자유로운 노마드의 삶을 추구하는 지구촌의 흐름을 역주행하는 ‘선거용 떴다방 졸부정치쇼’의 표본이자, 이 모든 사태들의 근본 원인이다. 서울 주변이라 서울에 편입되고 서울이어야 개발되는 논리라면 통영도 목포도 언젠가 서울이 될 것인데, 이럴 거면 하루라도 빨리 싱가포르나 바티칸처럼 도시국가 ‘서울민국’을 만드는 것이 요즘 말로 ‘개이득’ 아닐까 싶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박선화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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