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유니버스’와 힘에 의한 평화?

어쩌다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의 도시 전략 게임에 몰입할 일이 있었다. 게임에 진심인 아들의 유니버스에 다가가 볼까 하는 생각이 출발점이었지만 사실 내 안에 40년 동안 잠재해 있던 초등 시절의 욕망과 쾌감의 소환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놈의 세계가 그리 만만치 않다. 도시 레벨이 점점 올라감에 따라 집착과 애착이 증대되게 설계된 게임으로 그 안에서는 좀비 퇴치를 명분으로 한 네트워크 너머 인간들 간의 투쟁과 동맹의 장이 펼쳐져 있다.

이 게임 개발자들에게 가장 본원적인 동기는 물론 ‘현질’일 것이다. 돈을 쓰면 레벨이 쉽게 올라가고 여러 가지 건설 장비와 무기 장치를 갖추게 되니, 속성 성장에 익숙한 어린 유저들이 꽤 많은 현질을 하게 되었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따라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지만 이 나이에 현금을 내질러 좀비 따위를 물리쳤다고 자위하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그런 불평등한 외부 개입이 공정하지 않다는 나름 거룩한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게임의 세계관에서 보면 벼락부자 도시들은 어제와 다른 오늘을 시스템 밖의 힘에서 구하는 것이 허락되고 그 유혹은 게임이 유지되는 현실적 동력이 된다. 오랜 문명의 존폐가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좌우된 수많은 사례에 비추어 보면 이런 종류의 설계가 인류 역사를 그리 왜곡하는 것 같지도 않긴 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 게임에서 느낀 가장 큰 충격은 타워 디펜스라는 방어용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다른 도시에 대한 점령과 침략을 유도하도록 게임이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도시 레벨이 올라가는 초기, 많은 그래픽은 좀비로부터 나의 도시를 지키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전투 대상은 몬스터와 좀비 군단일 따름이고 시스템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가면 멋진 도시가 건설된다. 좀비와 싸우다보면 식량, 아파트, 병원 등의 보상들이 자동적으로 주어진다.

하지만 좀비 퇴치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뜻밖의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 느닷없는 침략군이 나타났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나의 도시는 불바다가 되었다. 좀비가 아니라 인간의 군대로 된 침략군의 존재는 충격적인 반전이었다. 약탈과 노략질의 대상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시 토목 게임에 좀비 퇴치 레벨 업 프로세스를 결합한 30년 전 수준의 일방향 게임을 상상하고 있던 내가 시대착오적이었음을 깨달았다. 평화를 지키는 것은 힘이요 결국은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이 세계관의 설계였던가? 이런 의문하에 시간이 날 때마다 군사 양성 코드를 누르고 군사의 전투 경험력을 재빨리 높이기 위해 좀비 퇴치 전투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설계자들은 부지불식간에 정교하게 그 비용을 회수하고 있었다. 병영 확장의 대가는 시스템에 머무는 나의 고귀한 시간 투자 비용만으로 충분할 것이라는 오만한 기대와 달리, 병사 양성의 대가로 추징하는 곡식의 양은 냉정할 정도로 늘어났다. 군비 투자가 민간 투자 삭감이라는 기회비용을 동반한다는 것은 현실의 상식인데 왜 나는 이를 간과했을까?

뒤늦게라도 비대해진 병영을 식량과 원료 채집에 내몰아 보았지만 설계자가 요구하는 채집 시간은 배가되어 있었다. 결국 병사의 과잉과 식량 부족의 조합은 침략과 약탈이라는 손쉬운 선택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약탈이 주는 짜릿한 쾌감과 단기에 채워진 곡간이 보장하는 포만감은 게임의 흥분도를 극도로 고조시켰다. 이제 설계자의 철학에 익숙해지고 ‘현질’ 아니면 약탈이라는 무한루프에 빠져들고 있는 주체할 수 없는 나의 욕망 그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힘에 의한 평화 그것을 추구한 결과는 평화가 아니라 무한한 힘의 축적과 대적 투쟁, 나아가 평화라는 이름의 약탈로 이어졌다. 굳이 방어 능력을 쌓는 것이라고 자위해 보지만 결국 가혹한 대체재인 시간과 곡식의 이중 추징 앞에 힘에 의한 평화라는 이름으로 공격적 인간의 욕망, 전쟁 영웅의 서사, 이익을 위한 동맹을 칭송하게 된다.

육사에서 홍범도 장군 동상을 철거하는 것은 동상이 생도의 대적관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라 한다. 대적관이 있어야 군대는 존립하는가? 그런 20세기 안보관은 침략과 약탈의 역사에 기초한 저열한 이분법이다. 인간안보를 넘어 신안보 시대의 미래군 엘리트들이 무얼 적으로 삼아야 안보관이 생긴다는 구닥다리 발상으론 평화의 미래는 요원하다. 21세기 평화는 이스라엘처럼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주검의 평화가 아니라, 그 수단마저도 평화인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여야 한다. 이 와중에 9·19 군사합의서를 파기해야 한다는 거룩한 국방부 수장의 욕망은 급등한 자기 주식 처분에 있음이 드러났으니, 힘에 의한 평화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 이 욕망을 어찌하오리까?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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