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국가 함정과 피크 코리아론

국가 정책결정의 중심이 국가안보인가 경제협력(발전)인가는 이분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 이런 식의 이분법은 지구화 시대의 다원주의 체제에 적합하지 않은 개념으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의 두 개 전쟁과 글로벌 사우스 문제를 대하는 각국 정부의 정책들에서 이런 이분법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우려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 비대칭동맹 전략하에 경제 발전을 추구해, 경제와 안보의 두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한국모델의 신화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여론도 이런 우려를 부추기는 데 일조하고 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돌아보면 한국 모델의 시효는 다 되었다는 ‘피크 코리아’론도 일리가 없지 않다. 무엇보다 한국 모델의 대전제인 미국의 공공재 제공 능력과 의사의 쇠퇴다. 미국은 더 이상 공공재 제공 국가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미국 외교관들은 패권국이 공공재 제공에 시달리는 사이 약소국들은 제 하고 싶은 일만 한다며 불만을 표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중산층을 위한 외교라는 바이든 행정부의 구호 역시 미국 민주당의 변심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글로벌 중추국가론은 선택이 아니라 비용분담 책무의 반영이라는 주장은 새로울 것도 없다.

다음으로 한국에 북한은 과거와 차원이 다른 위협이고 그 맞대응에 들어가는 매몰비용의 규모는 끝을 알 수 없다. 북한은 스스로를 전략국가로 자처하며 핵무기 70여개를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고 호언하고 있다. 여러 면에서 볼 때 북한의 태도는 현상유지적 정책이 아니라 공세적이고 확장적이다. 공세적 현상타파 국가가 등장하는 경우 관련 국가들도 안보국가화되는 길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잠재적 위협에 대비하는 과정에 많은 비용을 직접 투자해야 하지만, 과거처럼 동맹이 그 비용을 부담하고 무임승차하는 구도는 허용되지 않는다. 한국이 스스로 안보국가화의 길을 걷는 과정에 한국 경제의 투자 승수는 과거와 다른 길을 갈 것이라는 전제는 쉽게 부인하기 어렵다. 반면 북한은 지난 30년의 붕괴론을 걷어차고 현상타파 국가를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다. 북한 경제가 안정되었다고 평가할 근거도 없지만, 붕괴론과 위기론의 근거는 더욱 부족하다. 지난 30년간 북한의 위협은 점증했지만 북한 경제의 취약성은 그 위협을 실존적으로 묶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 경제와 외교에 대한 재평가는 북한의 위협이 그런 실존적 한계를 넘어서는 수준이 되고 있다는 경보로 전환되고 있다. 북한의 이런 변모는 중국과 러시아를 ‘재세계화’의 밖으로 내모는 과정이 낳은 결과일 수도 있다는 점은 뼈아프다.

한편 국가 역량에 대한 실존적 평가도 재론의 대상이다. 독일이나 일본 전문가들의 외교 전략에 대한 글을 읽다 보면 스스로를 중간국가 혹은 중견국가(middle power)로 규정하고 있는 경우가 왕왕 발견된다. 중간국가 전략은 한국처럼 중간국 혹은 중약국들의 외교적 선택을 둘러싼 개념이라는 것이 통념이었는데, 독일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이 스스로의 외교를 중간국가 틀로 규정하는 것은 왜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헤징’이나 ‘전략적 모호성’과 같은 전략은 사실상 미·중 두 슈퍼파워 간의 ‘재세계화’ 구도에 대한 여러 선진국들의 대응 전략으로나 가능한 것이지, 한국 같은 중약국들의 선택지가 아니라는 주장에 이르면 더더욱 할 말이 막힌다. 실존적으로 볼 때 한국 모델이라는 게 사실상 미국 단극 체제하의 우연적 특혜물일 따름이지 독자적인 내용이 없다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이 사용할 수 있는 중간국가 개념은 사실상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국가(legitimizer)로서나 유의미하지, 그것이 안보와 경제의 자율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내적 동력을 가진 국가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일본에서 제기되는 피크 코리아라. 한동안 일본을 디지털 후진국으로 바라보던 우리 MZ세대들의 시각에서 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미국에 인도·태평양(인·태)전략은 지역전략이고 일본에 한·미·일 협력은 소다자주의 전략일 뿐이다. 그런데 한국에 인·태전략은 세계전략이고 한·미·일 이니셔티브는 안보의 근간이다. 북한을 주적으로 삼고나니 생기는 변화이다.

현상타파국가 행세에 올인하고 있는 북한과의 안보경쟁 과정에, 미국의 확장억지 한계론이나 자체 핵보유론에 더해 핵방호체계론마저 제기된다. 자칫 9·19 군사합의서 폐기는 안보국가의 함정에 빠져 초가삼간마저 태운 사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119 대 29’라는 예상 밖의 수치 앞에 피크 코리아를 둘러싼 실존적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간다.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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