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티노라면 전두광을 어떻게 했을까

2023.11.29 15:39 입력 2023.11.29 20:56 수정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전두광 일당이 최한규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전두광 일당이 최한규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2차대전 당시 미군 특수부대를 다룬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 시나리오를 쓰면서 ‘히틀러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던 경험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옛날 영화를 재탕하고 싶진 않았어요. 영화가 그러면 실망스럽잖아요. (암살 위기의) 히틀러를 뒤로 빼내고 싶진 않았거든요. 그럼 어떻게 할까. 새벽 4시쯤에 시나리오를 쓰다가 결심했어요. ‘그냥 죽이자.’ 그래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렇게 썼어요. ‘X발 그냥 죽여.’ ”(2019년 5월 <지미 키멜 라이브>)

역사는 나치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가 연합군이 베를린을 점령하기 직전인 1945년 4월30일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전한다. 오랜 연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한 직후였다.

2차대전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따른다. 전투의 세부묘사를 부풀리고 등장인물을 가공하기는 하지만, 전쟁의 승패를 바꾸거나 히틀러의 죽음 정황을 각색하는 일은 거의 없다. 실제 있었던 히틀러 암살 시도를 다룬 <작전명 발키리>(2008) 역시 정의로운 독일군 장교가 히틀러를 거의 죽일 뻔 하다가 실패한 뒤 사형당하는 결말로 끝을 맺는다.

타란티노는 자신의 말대로 <바스터즈>에서 나치 선전영화를 보던 히틀러를 불에 태워 ‘그냥 죽였다’. 역사적 사실에 개의치 않고 영화로 ‘대체역사’를 쓴 것이다. 타란티노는 이후의 영화에서도 역사를 제멋대로 각색하곤 했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에서는 흑인 총잡이가 백인 노예상을 응징했다.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2019)에서는 임신 중인 배우 샤론 테이트를 죽였던 살인마 찰스 맨슨 일당이 배우 매니저 클리프(브래드 피트)에게 역으로 당했다. 살인마들은 개에 물리고 칼에 찔리고 화염방사기에 불타 죽지만, 현실에서 그들이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질렀는지 아는 관객에게 이 장면은 끔찍하기보단 통쾌하다.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한 장면. 유니버설 픽처스 제공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한 장면. 유니버설 픽처스 제공

개봉 중인 <서울의 봄>은 12·12사태를 다룬 영화다. 개봉 7일 만에 230만 관객을 모으며 얼어붙은 극장가를 오랜만에 달구고 있다. 등장인물 대다수가 군인이지만 본격적인 전투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오직 전화 통화, 급한 운전, 지도상의 표식으로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도 엄청난 긴박감을 자아낸다. 심지어 ‘역사가 스포일러’라 결말을 아는데도 서스펜스는 줄지 않는다. 신군부 반란군의 이름을 전두환에서 전두광, 노태우에서 노태건으로 바꿨다곤 하지만 이 영화가 대체로 실화에 기반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연과 필연이 뒤섞여 역사는 신군부의 집권과 군사독재의 연장으로 이어졌다. 민주화를 위해 이후로도 오랫동안 수많은 시민들의 희생과 노고가 필요했다. 이런 역사를 아는 나는 영화를 보며 상념에 잠겼다. <서울의 봄>에서 묘사된 하룻밤 사이 역사의 변곡점들이 조금만 달랐으면 어땠을까. 하나회 멤버 중 한두 명이라도 전두광의 야욕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국방부 장관이 조금만 더 분별 있고 유능한 사람이었다면, 8공수여단이 회군하지 않고 서울로 진입했다면….

한국의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대체역사 장르는 찾기 힘들다. 일본이 여전히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1980년대를 그린 복거일의 소설 <비명을 찾아서>(1987) 이후 웹소설을 중심으로 대체역사물이 이어졌다. 영화에선 <비명을 찾아서>와 유사한 설정을 가진 <2009 로스트 메모리즈>(2001)가 있었지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등장인물의 복식이나 먹는 음식만 바꿔도 ‘역사왜곡’이라는 평가가 나오곤 하니, 아예 가상의 왕조나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을 바엔 역사의 경로를 바꾸는 작품을 만들기 쉽지 않을 것이다.

브래드 피트는 대체역사를 창조한 타란티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착한 녀석이 이기고 모든 일이 다 잘 되는 영화, 텔레비전을 보며 자란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이 이렇게 되면 좋겠다’고 여겨지는 아름다운 장소에서 온 사람이죠. (…) 그는 좋은 일만 일어나고 나쁜 일은 안 일어나길 바라는 우리의 집단적 소망 위에서 작업합니다.”(2020년 1월 제35회 산타바르바라 국제영화제 대담)

내가 <서울의 봄>을 보면서 대체역사를 꿈꿨던 이유는 타란티노의 심정과 비슷했기 때문일까. 독일의 영화평론가 게오르그 제슬렌은 <바스터즈>를 두고 “이 영화는 히틀러처럼 스스로 죽은 나치범들을 영화를 통해 복수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현실 그 자체를 복수한다고 볼 수 있다”(전유정 논문 ‘B급 장르와 대체역사적 상상력’에서 재인용)고 분석했다. 만일 <서울의 봄>에 이어 두번째 12·12 영화가 기획된다면, 그땐 전두광 일당이 처참히 패배하는 대체역사물이기를 희망한다. 역사를 뒤틀고도 반성 없이 사라진 악당들에게 어떻게든 복수할 수 있도록. 타란티노의 또 다른 걸작 <킬 빌>이 인용하는 “복수는 식은 뒤 먹으면 맛있는 음식 같다”는 서양 속담을 증명할 수 있도록.

[백승찬의 우회도로]타란티노라면 전두광을 어떻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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