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지인에게서 질문을 받았다. 필자가 논의한 ‘한반도경제론’이 지금도 유효하냐는 것이다. 남북관계는 물론 한·중, 한·러 관계가 파탄 지경이니, 한반도경제라는 접근법은 공허해진 것 아니냐는 물음이다.
한반도경제론은 글로벌화 시대를 지나오면서 다듬어온 담론이다. 그런데 세계와 한반도는 2019년, 2022년 이후 극심한 역전이 가시화되었다. 필자는 이전부터 ‘뉴노멀 시대’로의 전환을 논의한 바 있다(<뉴노멀 시대의 한반도경제>, 2019). 그러나 최근의 상황 전개를 보면, (뉴)노멀 차원을 넘어선 카오스 시대가 열렸다 할 만하다. 담론을 다시 살피고 보완할 시점이다.
한반도경제론은 분단체제론의 인식방법을 계승했다. 분단체제론은 기본적으로 세계체제론의 일환이다. 분단체제론을 제기한 백낙청 교수는, 이미 1991년에 “경제의 기본단위를 국민경제로 보지 않는다, 세계경제를 기본단위로 봐야 한다”고 논의했다. 한반도경제론에서도 세계경제를 기본단위로 본다. 이 관점에 의하면, 한국경제는 세계경제-분단경제-국내경제의 세 개 층위를 가지면서, 정치적·군사적 영역과 상호작용을 한다.
한반도경제론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는 이 논의가 민족주의적 경제통합을 규범적으로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한반도경제론은 세계체제-분단체제에 연동된 복합적 현실을 인식하는 데 주된 관심이 있다. 일국 단위, 민족 단위를 넘어 연결된 체제·구조 전체를 인식하고자 한다.
남북한은 각기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로 유엔에 가입해 있지만, 남북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특수한 관계이기도 하다(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에서는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두 개의 국가가 성립되었다. 한국은 세계경제와 연결된 개방경제를, 북한은 세계경제와 차단된 폐쇄적 군사경제를 형성했다. 남북한은 서로를 극도로 의식하고 경쟁하면서 불균형 체제를 발전시켰다. 각자의 내부에서는 분단체제와 연관된 복합적 불균형·불평등 요소가 체제화되었다.
최근 정세와 관련, 한반도경제 차원에서 점검해야 할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윤석열 정부의 성격 문제다. 경제정책을 보면, 윤 정부는 재정정책엔 소극적이면서 시장과 산업에 자의적으로 개입했다. 체계적 정책 비전 제시 대신, 미국의 정책에 영합하는 ‘이념’ 전략을 앞세웠다. 윤 정부는 자국 위주의 산업정책과 군사동맹을 활용하는 미국 입장에 적극 동조했다. 반공 이념으로 미국의 보호주의에 동승했다. 1990년대 이래 작동하던 국제분업구조와 동아시아 네트워크를 공격했다.
그런데 윤 정부의 정책 퇴행은 한반도경제 악화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의 세계체제 무질서는 한국형 성장모델을 불안정화하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필자는 미·중 간 모순의 격화가 분단체제의 계기를 강화하고 한국 내부의 총체적 악화를 자극하는 구조적 환경이라고 말한 바 있다(경향신문, 2023·10·3).
필자의 견해에 대해, 백낙청 교수는 분단체제가 다시 공고해지긴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 미국은 과거의 냉전체제를 작동시킬 능력이 없고, 촛불혁명으로 고양된 민중의 힘이 분단체제의 재공고화를 제약한다는 것이다. 윤 정부의 퇴행은 ‘변칙적’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백낙청TV, 2023·12·8). 이는 민중 역사 관점의 분단체제론이다. 경제 역사에 주목하는 한반도경제론과는 인식의 차가 있을 수 있다. 좀 더 세밀한 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두 번째는 카오스에 대처하는 실천 방안의 문제다. 필자는 뉴노멀 시대의 발전전략으로 동아시아·태평양연합, 남북연합, 도시연합 등 3개 차원의 네트워크를 제안한 바 있다. 그런데 카오스의 난국은 한국이 적극적 네트워크 전략을 운용할 수 있는 입지를 축소했다. 중국이 너무 커졌고, 미국·중국 모두 아·태를 분열시키는 주요 행위자가 되었다. 윤석열 정부는 중간지대를 열어갈 잠재력을 스스로 훼손했다. 북·중·러 연결은 강화되었고, 한국이 북·미, 북·일 관계에 간여할 여지는 줄었다. 또 극단적 수도권 집중과 지역소멸 경향이 성장·재생산의 기반을 와해시키는 중이다. 사회와 정치는 분열했고, 지식은 방향을 잃었다. 어려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카오스에 대처하려면, 체제 전체에 대한 중도적·공화적 인식과 실천 이외에 다른 길이 있을까 싶다.
그간 지면을 내주셔서 감사했다. 고뇌를 함께 나눈 독자들께 절을 올린다. 호흡을 가다듬고 공부를 돌아보려 한다. 부디, 새해에는 절망을 태우고 남은 재가 다시 희망을 지피는 기름이 되기를 염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