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츠녀’가 말하지 않는 것

2024.02.19 20:01 입력 2024.02.19 20:06 수정

2월3일 새벽, 50대 배달노동자가 강남의 논현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뒤따르던 차량이 굉음을 내더니 배달노동자를 덮쳤다. 음주운전 사망사고였다. 다음날 현장을 찾았다. 노동자가 죽은 중대재해 현장이었지만 어떠한 표지도 없었다. 오늘도 생계를 위해 고개를 오르는 오토바이 바퀴들이 무심히 사고현장을 지나가고 있었다. 배달노동자의 선명한 핏자국만이 그날의 참변을 증언하고 있었다.

일부 언론이 가해자 신상을 공개하고 벤츠녀, 비숑녀 사건으로 명명했다. 음주운전은 시민뿐 아니라 배달/대리/택시 등 운수노동자와 도로 위를 정비하고 청소하는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산업안전 문제다. 가해자 차량과 성별은 이목을 끌고 조회수 올리는 데 도움이 될지언정 우리의 생명안전을 지키고 사고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작 배달노동자들은 ‘가족에게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꼭 알려주거나 유서처럼 휴대전화 비밀번호와 평소 일하던 배달앱 이름을 남겨놓으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주고받는다. 휴대전화와 앱은 플랫폼 노동자들의 노동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2019년 사망한 청소년 배달노동자의 유족들은 고인의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몰라, 배달업체에서 어떻게 일했는지 알기 어려웠다. 유족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는데 기적처럼 휴대전화가 열렸다. 집을 그리워하고 가족을 사랑했던 고인의 마음이 잠겨 있던 휴대전화를 열었다.

휴대전화를 열면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린다. 사고 순간에 어떤 플랫폼에 접속해 있었는지 알기 어렵다. 배민, 카카오퀵, 쿠팡이츠, 요기요 같은 대형플랫폼에서 일을 했을 수도, 작은 배달대행사 앱을 이용해 일했을 수도 있다. 앱에서 로그아웃하고 퇴근하는 길에 일어난 사고라면 마지막으로 접속한 앱을 찾느라 애를 먹는다. 보통 휴대전화 액정화면이 박살나 있기 때문에 포렌식을 해야 하는데, 필요한 정보가 누락될 가능성도 있다. 플랫폼기업은 노동자가 앱을 종료하더라도 노동자의 위치정보를 수집하지만, 이 데이터가 노동자의 산재예방과 산재보상처리를 위해 활용되지는 않는다. 더구나 타인 명의 휴대전화로 일을 했다면 데이터상 노동자와 실제 일하는 노동자의 정보가 달라 데이터를 요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휴대전화 속 가상적 작업장과 도로 위 현실 속 작업장의 괴리는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새로운 문제를 만든다.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장례식장에 들렀다. 자극적인 언론보도에 괴로워한 유족은 기자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고인과 유족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기다리고 있던 모 언론사 기자가 나를 쫓아오며 물었다. ‘보상은 어떻게 되었나요?’ 방금 먹은 장례식장 육개장의 뒷맛이 씁쓸하게 올라왔다. 험한 말이 나올 것 같아 자리를 피했다.

우리는 개인의 삶을 관음적으로 파헤치는 데 집중하느라 공적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잊었는지 모른다. ‘실시간으로 회사가 바뀌는 플랫폼 노동자의 산업안전을 어떻게 보장할 것이며 기업과 공공의 책임은 무엇인가?’ ‘고인의 노동데이터는 어떻게 확보할 것이며 노동자의 산재예방을 위해 플랫폼이 확보한 데이터를 활용할 수는 없는가?’ 우리 사회가 답을 찾아야 할 질문들은 가해자의 성별과 차종이 아니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조직국장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조직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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