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유독 개운한 책이다. 시간에 관한 우리의 직관을 하나씩 무너뜨려 종국에는 극단적으로 황량하고도 무한한 가능성으로 빛나는 공(void)의 풍경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이런 글을 읽다보면 일상을 살아가며 비대해진 자아는 줄어들어 티끌로 느껴지고 이내 상쾌해진다.
인간이 시간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간은 유일하지 않다. 장소와 속도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 둘째, 방향도 정해져 있지 않다. 사물의 미시적 상태를 관찰하면 과거와 미래 차이가 사라진다. 셋째, 광활한 우주에 ‘현재’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넷째, 시간은 독립적이지 않다. 시간은 우주의 다른 실체들과 상호작용할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
책에 따르면,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은 외부에서 본 세상이 아닌 내부에서 본 세상이다. 외부에서 따로 존재하는 진실이란 것은 난센스인데, 세상에서 ‘벗어난’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오직 사건들과 관계들이다.
저자는 말한다.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이다.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이다. (…) ‘사물’의 전형은 돌이다. 내일 돌이 어디 있을 것인지 궁금해할 수 있다. 반면 입맞춤은 ‘사건’이다. 내일 입맞춤이라는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날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상은 돌이 아닌 이런 입맞춤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다.”
최근 말 그대로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경험을 했다. 일주일 남짓의 기간 동안 외부와의 접촉이 끊어진 채 휴대폰과 시계를 빼앗기고 한 건물에 감금된 것이다. 절찬리 방영 중인 이념 서바이벌 예능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를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평소에 만날 리 없는 열두 명의 사람을 만났다. 각자 직업도, 성장배경도, 가치관도 다른 사람들이었다. 출연진은 사전 테스트를 통해 좌파/우파, 페미니즘/반페미니즘, 서민/부유, 개방/보수의 네 범주로 자신이 가진 사상이 채점됐다. 싸우라고 모아둔 것 같은 이곳에서 주어진 일은 커뮤니티의 최종 목표를 잘 알지 못한 채로 일종의 가상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한정된 자원으로 며칠간 먹고살아야 한다는 외부적인 위협 외에 내부적인 위협이 또 있었는데 그것은 커뮤니티 내의 “불순분자”였다. 불순분자의 의미는 둘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갈등을 조장하고 이를 통해 이득을 얻는 세력이 있는 현실 정치에서처럼 우리의 갈등이 어쩌면 서로의 생각이 달라서 빚어지는 갈등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또 하나는 정체가 불분명한 누군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얼마나 그 혐의로 활용하는지를 보이는 것이다. 나의 경우 코드 점수 11점의 페미니스트로 가장 극단적인 정치 입장을 가진 사람으로 채점됐다. 불순분자. 사상이나 이념이 그 조직의 것과 달라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 고백하자면 촬영 내내 스스로, 또 사람들에게 자주 한 말은 “내가 불순분자 같다”는 말이었다. 그만큼 위축되어 있었는데, 방송을 보고서야 내 안의 두려움이 얼마나 내 시야를 좁혔는지를 알게 됐다.
<더 커뮤니티>의 시간은 모두에게 다르게 흐른다. 각각의 출연진에게도, 현장과 편집된 영상 사이에서도, 이 작품을 소재로 이야기를 나누는 온갖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그렇다.
물리학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이 외부에서 본 세상이 아니라 내부에서 본 세상이라면, 옳고 그름의 기준이 고작 우리와 가까이에 있는 거품 안에서만 통용된다면, 남는 것은 결국 사건과 관계일 테다.
쇼 안에 등장하는 출연진 사이의 관계, 작품과 시청자의 관계, 쇼가 끝난 후 시청자가 세상과 맺을 관계. 이것은 입맞춤의 네트워크가 될까 암살의 네트워크가 될까? 황량하고도 무한한 가능성으로 빛나는, 시간이 멈춘 풍경에 질문이 남아 있다.